좋은 시 느낌하나

겨울 산촌/ 문병란

종이연 2021. 2. 1. 19:50

 

겨울 산촌(山村)

 

문병란

 

사방이 막혀버렸다, 깊은 겨울

버스도 들어오지 않았다, 차라리 막혀버려다오.

 

겨울은 내 고향의 구들목에

미신이 들끓는 달,

지글지글 끓는 사랑방 아랫목에서

머슴들의 사랑이 무르익어가는 달,

화투장 위에도 밤새도록 흰 눈이여 쌓여다오.

 

겨울 산촌(山村)은 막힌 대로가 좋아

눈은 이틀째 자꾸만 내리고

자꾸만 내리고

신문도 배달부도 안 오는 깊은 겨울.

 

도시에서 실려오는 편지도

새마을 잡지도 오지 말아다오

차라리 신문이여 오지 말아다오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유행가여 들리지 말아다오

지불명령을 가지고 오는 우체부 아저씨여 오지 말아다오.

 

눈 내리는 소리만 들리게 하고, 차라리

호롱불 가에서 심청전을 읽으며 울게 해다오

춘향이와 이도령의 서러운 이별을 함께 울게 해다오.

 

이틀째 이틀째 내리는 눈, 심란하게 심란하게 내리는 눈,

과부네 집 창가에 바스락거리는 눈,

눈 녹으면 어이할거나, 얼음 풀리면 어이할거나.

 

읍내로 나가는 고개도 막히고, 학교로 나가는 앞길도 막히고

간이역으로 나가는 윗길도 막히고,

막힌 땅에서 농부가 울어, 막힌 가슴으로

고향이 울어.

 

차라리 모두 다 막혀버려다오

차라리 모두 다 막혀버려다오.

 

죽순밭에서, 인학사,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