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운동장을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 유홍준

종이연 2021. 2. 7. 13:45

운동장을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유홍준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저절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길쭉한 사람이다 다리도
길고 목도 길고 뒤통수도 길고 귀도 긴 사람이다 어깨 축 처진
검정 옷을 입은 사람이다 제 삶이 어떤 건지 한 번 중간 점검해
보는 사람이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
한 가운데 서 보는 사람은

 

차마 어찌 할 바를 모르는 사람, 흙먼지를 한 번 오지게 뒤집어 써보는
사람이다 어디 피할 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이다 마치 고문
당하는 사람이고 마치 숙청당하는 사람이다 모름지기 인간의 그림자
가 이렇게 길고 이렇게 홀쭉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사람이다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스스로 고개를 꺾는 것이다
그림자 중에 가장 긴 그림자는
운동장에 드리운 그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