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풀여치 / 홍일표

종이연 2021. 8. 12. 20:30

풀여치 

 

홍일표

 

 

늦가을 오후 교정에서 뜻밖의 손님을 만났다 서울의 한복판 시멘트로 덮인 교정 어디에도 그의 불법 체류를 허용할 초록의 땅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몰래 잠입하여 화단가에 살포시 앉아 가느다란 숨을 쉬고 있었다 그가 봄부터 거느리고 온 길은 마른 지푸라기로 풀섶에 놓여 있었다 가까이 가서 얘야 하고 불러도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너를 다 안다는 듯 가늘고 긴 더듬이만 살짝 들었다 놓았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풀잎이 전하는 이야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풀잎과 더불어 봄을 지나고 여름을 건너왔다 그리고 홀연 나에게로 왔다 마음이 아팠다 가늘고 여린 다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와 오래 눈을 맞추고 있는 사이 녀석은 슬며시 풀잎이 되어 있었다 초록의 날개를 가진, 맑고 투명한 한 잎의 천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화단에서 홀로, 대책 없이 저무는 가을을 온몸으로 밀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