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계단에 웅크린 여인/ 김충규

종이연 2022. 2. 22. 19:53

계단에 웅크린 여인

 

김충규

 

캄캄한 빗속에서 달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빗물이 줄줄 새는 계단에 여인이 웅크려 있었다

탯줄이 붙은 어린 달이 여인의 몸에서 떨어졌다

계단 밖의 나무 떼가 하나같이 여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계단 밑을 오가는 사람들의 눈에 여인은 보이지 않는 걸까

달에서 내려온 듯 환한 여자인데 왜 못 보는 걸까

빗소리가 적막한 골짜기를 무수히 만들고 달의 울음소리가 더 처연해졌다

울음소리를 내는 것은 그 무엇이든 제 속에 우물을 갖고 있는 법

달의 우물은 얼마나 아득한 깊이일까

달의 살 냄새가 빗물에 풀리고 풀려 나가 밤의 고요가 환해질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다 계단에 웅크린 여인의 몸은 젖어있지 않았다

지상의 사람이 아닌지 빗물이 전혀 닿지 않았다

그 누구도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았다

달의 세계로 오르는 계단인 듯

비 그치면 여인은 몸을 일으켜 저벅저벅

그 계단을 통해 달의 세계로 올라가려는 걸까

계단 밖의 나무 떼가 달을 숭배하는 어떤 집단의 사제들처럼

빗줄기의 아우성에도 조금의 자세도 흐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