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당신은 누구십니까/ 도종환

종이연 2021. 3. 19. 19:37

당신은 누구십니까

 

 

도종환

 

 

 

강으로 오라 하셔서 강으로 나갔습니다

강으로 수천개 햇살을 불러내어 찬란하게 하시더니

산그늘로 모조리 거두시고 바람이 가리키는

아무도 없는 강 끝으로 따라오라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숲으로 오라 하셔서 숲속으로 당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만나자 하시던 자리엔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를 대신 보내곤

몇 날 몇 밤을 붉은 나뭇잎과 함께 새우게 하시는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고개를 넘으라 하셔서 고개를 넘었습니다

고갯마루에 한 무리 기러기떼를 먼저 보내시곤

그중 한 마리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시며

하늘 저편으로 보내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저를 오솔길에서 세상 속으로 불러내시곤

세상의 거리 가득 물밀듯 밀려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났단 사라지고 떠오르다간 잠겨가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상처와 고통을 더 먼저 주셨습니다 당신은

상처를 씻을 한 접시의 소금과 빈 갯벌 앞에 놓고

당신은 어둠 속에서 이 세상에 의미 없이 오는 고통은 없다고

그렇게 써 놓고 말이 없으셨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지금 풀벌레 울음으로도 흔들리는 여린 촛불입니다

당신이 붙이신 불이라 온몸을 태우고 있으나

제 작은 영혼의 일만팔천 갑절 더 많은 어둠을 함께 보내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좋은 시 느낌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날 하루 /김종해  (0) 2021.03.21
고산식물 /박두진  (0) 2021.03.20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송찬호  (0) 2021.03.18
.바다와 나비/김기림  (0) 2021.03.17
이 땅에 봄이 올때/도종환  (0) 2021.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