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황동규 - 엽서

종이연 2008. 3. 13. 11:38
황동규 - 엽서

1
며칠 내 시작한 눈 그치지 않은 어느 저녁 네가 거리로 나오면
침묵이 있고 눈을 인 어깨가 있는 한 사내를 만나게 될 것을.
그 사내 등뒤에 내리는 설경(雪景)을 만나게 될 것을.
그 설경 속에 모든 것은 지금 말이 없다.
너는 알리라, 떠날 때보다는 내 얼마나 즐겁게 돌아왔는가.
외로운 것보다는 내 얼마나 힘차게 힘차게 돌아왔는가.

2
꿈을 꾸듯 꿈을 꾸듯 눈이 내린다.
바흐의 미뉴엣
얼굴 환한 이웃집 부인이 오르간 치는 소리.

그리하여 돌아갈 때는 되었다.
모퉁이에 서서 가만히 쌓인 눈을 털고
귀기울이면 귀기울이면
모든 것이 눈을 감고 눈을 받는 소리.

말하자면 하나의 사랑은 그렇게 받는 것이 아닐 건가.
그리하여 받는 사람의 얼굴이 모르는 새 빛나
이윽고 눈을 맞은 얼굴을 쳐들 때
오고픈 곳에 오게 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닐 건가.

이제 돌아갈 때는 되었다.
눈이 내리는 날, 이웃집 부인이 오르간 치는 소리.
고개 숙인 얼굴에 빛이 올라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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