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문병란
한 그루 나무와 같이
묵묵히 서 있는 저녁의 기도가 아니다.
한밤중 뜨는 달처럼
그렇게 어설프지 않고
푸른 과수원에 넘치는 향기처럼
그렇게 황홀히 젖는 달빛이 아니다.
단단히 쥐어진 주먹
뜨겁게 부딪치는 찰나에 꽃피는 아픔,
벌떡벌떡 숨쉬는 허파 속에 있고
추리고 추린 오늘의 동사(動詞),
온몸으로 으깨리는 눈물 속에 있다.
부드러움 속엔 이미 부드러움이 없고
사랑의 속삭임 속엔 이미 사랑이 없다.
언어는 손가락 새로 빠져나가는 새하얀 달빛
시(詩)는 이미 시(詩) 속에 없고,
손끝에 닿으면 타버리는 한줄기 불꽃
재 속에서 추리는 마지막 사리(舍利)이다.
시(詩)는 가을 하늘에 떠도는 조각구름
강물에 비치는 후조(侯鳥)의 날개가 아니라
시(詩)는 때묻은 발바닥
모독당한 오늘의 양심에 있고
맹물이 아닌
우리들의 뜨거운 눈물,
한방울 이슬이 아닌
우리들의 뜨거운 피를 마시고 피는
모진 장미의 까시
콕콕 찌르는 분노에 있다.
우리들의 시(詩)는 이미 쫓겨난 왕자,
한밤에 부르는 세레나데가 아니고
허리가 꺾인 코스모스
창백한 백합의 흐느낌이 아니다.
엉겅퀴처럼 억세게
들찔레처럼 어기차게
칡덩굴처럼 쭉쭉 뻗어
뽑혀도 뽑혀도 다시 살아나는 뿌리에 있다.
아직도 낡은 연미복을 입은 시인아
이제는 시들은 꽃다발은 던져버려야 한다
가냘픈 피리는 내던져버려야 한다
시(詩)는 시(詩)가 끝나는 데서부터 다시 시작돼야 한다.
아직도 한밤중
흉중에 뜨는 명월(明月)을 안고
아쉽게 매아미 껍질을 어루만지는 손아
황홀히 보석을 들여다보는 공허한 눈아
언어를 사랑할 때
언어는 이미 연금술사의 마술
증발한 맹물 속에 시(詩)는 없다.
시인아!
시(詩)를 버려라, 연연한 마음 속에
이미 시는 없고
부드러운 혀끝에 박힌 까시,
천년의 여의주(如意珠)는 깨어졌다.
보다 뜨거운 가슴을 위하여
보다 피아픈 운율을 위하여
시인아 시(詩)를 버려라
시인아 시(詩)를 배반하여라
그대 교과서 속에서
그대 애인의 눈동자 속에서
진정 그대 시집 속에서
죽어가는 시(詩)의 껍질을 버리고
정수리를 퉁기는 까시가 되라
복판으로 날아가는 창끝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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