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세 사람의 가족 / 박인환

종이연 2021. 8. 14. 14:42

세 사람의 가족 

 

박인환



나와 나의 청순한 아내
여름날 순백한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는 유행품(流行品)으로 화려한
상품의 쇼우 윈도우를 바라보며 걸었다.

전쟁이 머물고
평온한 지평에서
모두의 단편적인 기억이
비둘기의 날개처럼 솟아나는 틈을 타서
우리는 내성과 회한에의 여행을 떠났다.

평범한 수확의 가을
겨울은 백합처럼 향기를 풍기고 온다.
죽은 사람들은 싸늘한 흙 속에 묻히고
우리의 가족은 세 사람.

토르소의 그늘 밑에서
나의 불운한 편력인 일기책이 떨고
그 하나하나의 지면은
음울한 회상의 지대로 날아갔다.

아 창백한 세상과 나의 생애에
종말이 오기 전에
나는 고독한 피로에서
빙화(氷花)처럼 잠들은 지나간 세월을 위해
시(詩)를 써본다.

그러나 창 밖
암담한 상가
고통과 구토가 동결된 밤의 쇼우 윈도우
그 곁에는
절망과 기아의 행렬이 밤을 새우고
내일이 온다면
이 정막(靜寞)의 거리에 폭풍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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