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분꽃지는 날/ 노향림

종이연 2021. 8. 15. 17:51

분꽃지는 날

 

 

노향림



분꽃 흐드러지게 핀 요양소 담벽 아래
갈라터진 느티 밑동에 노파들이
윤기 없는 손으로 손거울을 움켜쥐고 있다.

더러는 여름 한낮의 햇살에 안겨 졸고 있고
더러는 그늘을 찾아 죽은 나무에도
꽃이 핀다고 쭈글해진 젖꼭지를 드러낸 채
흰꽃 분홍꽃 다 피운 까만 꽃씨들을 따서
너른 돌에다 짖찧는다.

콩닥 콩각 짖찧는 소리 멀리 돌아
꽃구름 사각다리로 가파르게 올라가고
뽀얀 분가루가 다비식을 끝낸 뼛가루처럼
풀썩 풀썩 날린다.

붉은 꽃떨기 핀 시절은 어느 결에 지나가고
만지면 우수수 지거나 바스라질 듯한 몸으로
아직도 그리운 것은 남아 왈칵, 목멘다고
분꽃가루를 검버섯 핀 얼굴에 찍어 바른다.
반사된 손거울만한 햇살이 저만치서
엉겨 눈이 부시다.

어디선가 한번쯤 보았던 저승꽃이 핀 얼굴들엔
분이 먹혀들어가지 않는다.
잘 여문 분꽃 씨앗들이 제 몸 밖으로 밀어내는
사리처럼 툭툭 떨어져 나뒹군다.
요양소 너머 저녁 어스름이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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