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귀향의 노래/고정희

종이연 2008. 1. 17. 12:56
귀향의 노래/고정희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의 짐짝 위에
아직 겨울 찬비가 줄기차구나
저기가 내 그리운 귀착지,
머나먼 여정을 달려온 나의 말이여
마중나온 북한산이 다가와
이제 무릇 날개를 접으라 한다
마중나온 관악산이 다가와
이제 응당 말을 놔주라 한다
속에서 시가 넘쳐흘러도
받아쓰지 않을 용기를 가지라 한다

나는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내 푸득이는 어깨죽지를 더욱 작게 접어
고요의 평원에 착륙할 수 있을까
오랜, 도지는 신병 같은 내 말의 허기증을
뒤쪽으로 꾹꾹 눌러둘 수 있을까

도도한 저녁 숲에 상수리나무들이 젖고 있구나
내 자손만대도 젖고 있구나
여기가 내 사무치는 귀향지,
방울소리 설렁대는 나의 말이여
동행하는 안산이 나더러
이제 그만 상처를 싸매라 한다
동행하는 반월평야가 나더러
이제 그만 역마살을 동여매라 한다
한동한 눈 맞으며, 눈 맞으며 살자 한다

나는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속에서 넘치는 말을 받아
눈그늘 깊게 하는 술 한동이 빚을 수 있을까
향내 진진한 술 한잔 받쳐들고
나는 너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고정희 유고시집
-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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