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11월을 빠져나가며 /정진규

종이연 2024. 11. 19. 20:31

11월을 빠져나가며

 

정진규

 

                   

 

흙담장에 걸린 먼지투성이 마른 씨래기 다발들
남루한 내 사랑들이 버석거린다
아직도 이파리들 땅에 내려놓지 못할 몇 그루 은행나무들이 이해되지 않으며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다른 이들의 철 지난 사랑이 이해되지 않는다
혼자서 돌아오는 밤거리 골목길에 버려진 고양이들이 날로 늘어나고
나는 자꾸 올라가고 있는데 계단들은 그만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며 비어지고 있다
빈 계단들이 허공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이제 너에게로 돌아가는 길은 위기로만 남아 있구나
골목길 들어서면 겨우 익숙한 저녁 냄새만 인색하게 나를 달랜다
이 또한 전 같지 않다
12월 때문에 11월은 가장 서둔다
끝나기 전에 끝내야 할 일들이 한꺼번에 들통나고 있다
야적까지 하고 있는 빈터, 그빈터에서도 우리도 서둘러 끝내자
내리는 눈이라도 기념으로 맞아두자
마른 풀대들은 물론이거니와 나무와 나무들 사이가 분명해지고
강가에 서면 흐르는 물소리들도 한껏 야위어 속살 다아 보인다
서로 벌어져 있다
가장 견고하다는 네 사유의 책갈피도 여며지지 않는다
머물렀다고 할 수 없다
서둘러 11월은 빠져나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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