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여
문덕수
나는 겨우 몇 발짝 뗄 수 있는 내 앞밖에는 보지 못한다. 그 앞도 시력이 끝나는 지평 밖은 암흑이다. 뒤를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뒤로 돌려야 하는데, 그때는 조금 전의 그 앞이 새로운 뒤로 바뀐다. 사람은 그 뒤를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 뒤는 암흑 세계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혹은 왼쪽으로도 돌릴 수 있으나, 그래도 좌우는 언제나 남아서 암흑 세계다. 이런 암흑 속에서도 나는 무사하다.
나는 삼수 끝에 겨우 운전 면허증을 땄다. 운전대에 앉기만 하면 손이 떨린다. 앞차의 꽁무니만 보고 열심히 따라간다. 후면과 좌우는 암흑이다. 좌우로는 살벌한 차량들이 엇갈리고, 뒤로는 덤프, 택시, 버스들이 덮칠 듯이 바싹 붙어서 밀려온다. 그래도 나는 용하게 살아남아서 달린다. 누가 이 암흑, 이 결여(缺如)를 보충해주고 있는 것일까.
조금씩 줄이면서, 시문학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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