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720

가을 햇볕 /고운기

가을 햇볕 고운기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오래 흘러온 강물을 깊게 만들다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여고 2학년 저 종종걸음 치는 발걸음을 붉게 만들다, 묽그스레 달아오른 얼굴은 생살 같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다 그리하여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멀어지려 해도 멀어질 수 없는 우리들의 손을 붙잡게 하고 끝내 사랑한다 한마디로 옹송그린 세월의 어느 밑바닥을 걷게 한다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김용택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김용택 사랑의 온기가 더욱 더 그리워지는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먼 들 끝으로 해가 눈부시게 가고 산 그늘도 묻히면 길가에 풀꽃처럼 떠오르는 그대 얼굴이 어둠을 하얗게 가릅니다 내 안에 그대처럼 꽃들은 쉼없이 살아나고 내 밖의 그대처럼 풀벌레들은 세상의 산을 일으키며 웁니다 한 계절의 모퉁이에 그대 다정하게 서 계시어 한없이 걷고 싶고 그리고 마침내 그대 앞에 하얀 풀꽃 한 송이로 서고 싶어요

가을하늘 /유종인

가을하늘 유종인 하늘이 더 깊어진 것이 아니다 눈앞을 많이 치운 탓이다 밥그릇처럼 뒤집어도 다 쏟아지지 않는 저 짙푸른 늪같이 떨어지는 곳이 모두 바닥은 아니다 열린 바닥이 끝없이 새떼들을 솟아오르게 한다 티 없다는 말, 해맑다는 말! 가을엔 어쩔 수 없다는 말, 끝 모를 바닥이라는 말! 바닥을 친다는 것 고통을 저렇게 높이 올려놓고 바닥을 친다는 것 그래서 살찌고 자란다는 것! 당신이 내게 올 수도 있다는 것 변명은 더 이상 깊어지지 않는다는 것!

가을 저녁의 시 /김춘수

가을 저녁의 시 김춘수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다는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는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거가 버리는가보다

가을저녁에 /소월

가을저녁에 소월 물은 희고 길구나, 하늘보다도 구름은 붉구나, 해보다도. 서럽다, 높아가는 긴 들 끝에 나는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 그늘 깊어 오르는 발 앞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길은 앞으로 키 높은 나무 아래로, 물마을은 성깃한 가지가지 새로 떠오른다 그 누가 온다고 한 언약도 없건마는! 기다려 볼 사람도 없건마는! 나는 오히려 못물가를 싸고 떠돈다 그 못물로는 놀이 잦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