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볕 /고운기 가을 햇볕 고운기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오래 흘러온 강물을 깊게 만들다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여고 2학년 저 종종걸음 치는 발걸음을 붉게 만들다, 묽그스레 달아오른 얼굴은 생살 같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다 그리하여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멀어지려 해도 멀어질 수 없는 우리들의 손을 붙잡게 하고 끝내 사랑한다 한마디로 옹송그린 세월의 어느 밑바닥을 걷게 한다 좋은 시 느낌하나 2022.11.14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김용택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김용택 사랑의 온기가 더욱 더 그리워지는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먼 들 끝으로 해가 눈부시게 가고 산 그늘도 묻히면 길가에 풀꽃처럼 떠오르는 그대 얼굴이 어둠을 하얗게 가릅니다 내 안에 그대처럼 꽃들은 쉼없이 살아나고 내 밖의 그대처럼 풀벌레들은 세상의 산을 일으키며 웁니다 한 계절의 모퉁이에 그대 다정하게 서 계시어 한없이 걷고 싶고 그리고 마침내 그대 앞에 하얀 풀꽃 한 송이로 서고 싶어요 좋은 시 느낌하나 2022.11.13
가을하늘1 / 정완영 가을하늘1 정완영 전선 위에 앉아 있는 제비들이 날아갑니다 가을 하늘 푸른 건반을 두드리며 날아갑니다 하늘엔 음악이 흐르고, 흰 구름이 흘러갑니다 가을 하늘2 정완영 요즘 하늘빛은 하루 한 길씩 높아가요 저러다 넘칠 것 같아요 무너질 것 같아요 구름도 따라가다가 지쳐 눕고 말아요 좋은 시 느낌하나 2022.11.12
가을의 소원 /안도현 가을의 소원 안도현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것 마른풀처럼 더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좋은 시 느낌하나 2022.11.11
가을볕 /박노해 가을볕 박노해 가을볕이 너무 좋아 고추를 따서 말린다 흙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높푸른 하늘에 내걸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어 눈 부시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난 내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좋은 시 느낌하나 2022.11.10
가을하늘 /유종인 가을하늘 유종인 하늘이 더 깊어진 것이 아니다 눈앞을 많이 치운 탓이다 밥그릇처럼 뒤집어도 다 쏟아지지 않는 저 짙푸른 늪같이 떨어지는 곳이 모두 바닥은 아니다 열린 바닥이 끝없이 새떼들을 솟아오르게 한다 티 없다는 말, 해맑다는 말! 가을엔 어쩔 수 없다는 말, 끝 모를 바닥이라는 말! 바닥을 친다는 것 고통을 저렇게 높이 올려놓고 바닥을 친다는 것 그래서 살찌고 자란다는 것! 당신이 내게 올 수도 있다는 것 변명은 더 이상 깊어지지 않는다는 것! 좋은 시 느낌하나 2022.11.09
가을 저녁의 시 /김춘수 가을 저녁의 시 김춘수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다는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는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거가 버리는가보다 좋은 시 느낌하나 2022.11.08
가을저녁에 /소월 가을저녁에 소월 물은 희고 길구나, 하늘보다도 구름은 붉구나, 해보다도. 서럽다, 높아가는 긴 들 끝에 나는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 그늘 깊어 오르는 발 앞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길은 앞으로 키 높은 나무 아래로, 물마을은 성깃한 가지가지 새로 떠오른다 그 누가 온다고 한 언약도 없건마는! 기다려 볼 사람도 없건마는! 나는 오히려 못물가를 싸고 떠돈다 그 못물로는 놀이 잦을 때 좋은 시 느낌하나 2022.11.07
가을 통화 /문인수 가을 통화 문인수 반갑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잘 못 건 이의 목소리가 저 어느 별이었는지 갈색 전화기 캄캄하게 엎드린 이 섬엔 돌아올 사람 없습니다 어머니 제 전화를 오래 받으시겠습니까 좋은 시 느낌하나 2022.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