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711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허영자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허영자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묵은 편지의 답장을 쓰고 빚진 이자까지 갚음을 해야 하리 아무리 돌아보아도 나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진 못하였으니 이른 아침 마당을 쓸 듯이 아픈 싸리비 자욱을 남겨야 하리 주름이 잡히는 세월의 이마 그 늙은 슬픔 위에 간호사의 소복 같은 흰눈은 내려라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12월의 시/최홍윤

12월의 시 최홍윤 바람이 부네 살아 있음이 고맙고 더 오래 살아야겠네 나이가 들어 할 일은 많은데 짧은 해로 초조해지다 긴긴밤에 회안이 깊네 나목도 다 버리며 겨울의 하얀 눈을 기다리고 푸른 솔은 계절을 잊고 한결같이 바람을 맞는데 살아 움직이는 것만 숨죽이며 종종걸음치네 세월 비집고 바람에 타다 버릴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데 시간은 언제나 내 마음의 여울목 세월이여 이제 한결같은 삶이게 하소서

12월/오세영

12월 오세영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 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 유성처럼 소리 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드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무를 위해서 꿈이 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 ​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쓰러 마라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사랑은 성숙하는 것 ​화안이 밝아오는 어둠 속으로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 ​눈 떠라. 절망의 그 빛나는 눈.

12월의 독백/오광수

12월의 독백 오광수 ​남은 달력 한 장이 작은 바람에도 팔랑거리는 세월인데 한해를 채웠다는 가슴은 내놓을 게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자고 다잡은 마음이었는데 손 하나는 펼치면서 뒤에 감춘 손은 꼭 쥐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비우면 채워지는 이치를 이젠 어렴풋이 알련만 한 치 앞도 모르는 숙맥이 되어 또 누굴 원망하며 미워합니다. 돌려보면 아쉬운 필름만이 허공에 돌고 다시 잡으려 손을 내밀어 봐도 기약의 언질도 받지 못한 채 빈손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해마다 이맘때쯤 텅 빈 가슴을 또 드러내어도 내년에는 더 나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데 어쩝니까

그리운 편지 /이응준

그리운 편지 이응준 그 도시에서 11월은 정말 힘들었네 그대는 한없이 먼 피안으로 가라앉았고 나는 잊혀지는 그대 얼굴에 날 부비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가에 대하여 덧없이 많은 날들을 기다렸지만 무엇이 우리 주위에서 부쩍부쩍 자라나 안개보다도 높게 사방을 덮어가는가를 끝내 알 수는 없었네 11월이 너무 견디기 어려웠던 그 도시에서 그대가 가지고 있던 백 가지 슬픔 중에 아흔아홉으로 노래 지어 부르던 못 견디게 그리운 나는

11월의 나무처럼 / 이해인

11월의 나무처럼 이해인 ​ 사랑이 너무 많아도 사랑이 너무 적어도 사람들은 쓸쓸하다고 말하네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큰 사랑을 주신 당신에게 감사의 말을 찾지 못해 나도 조금은 쓸쓸한 가을이예요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어놓는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 욕심의 그늘로 괴로웠던 자리에 고운 새 한 마리 앉히고 싶어요 ​11월의 청빈한 나무들처럼 나도 작별 인사를 잘하며 갈 길을 가야겠어요

11월에는 /이희숙

11월에는 이희숙 붉은 가을이 그대 웃음에 걸려 서성이는 동안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을 영접하고 떨어짐마저 기쁘게 허락하는 나무의 삶을 배우자 찬란한 가을이 그대 이마에 앉아 꿈꾸는 동안에는 겸손한 마음으로 밤을 배웅하고 인디언처럼 춤추고 노래하자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빠른 때라는 걸 미처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아직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달 11월에는 꿈을 노래하고 희망을 이야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