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711

시월을 추억함 /나호열

시월을 추억함 나호열 서러운 나이 그 숨찬 마루턱에서 서서 입적한 소나무를 바라본다 길 밖에 길이 있어 산비탈을 구르는 노을은 여기저기 몸을 남긴다 생이란 그저 신이 버린 낙서처럼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풀꽃이었을까 하염없이 고개를 꺾는 죄스런 모습 아니야 아니야 머리 흔들 때마다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검은 씨앗들 다버린 눈물로 땅 위에 내려앉을 때 가야할 집 막막하구나 그렇다 그대 앞에 설 때 말하지 못하고 몸 뒤채며 서성이는 것 몇 백년 울리는 것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었던가 향기를 버리고 빛깔을 버리고 잎을 버리는 나이 텅 빈 기억 속으로 혼자 가는 발자국 소리 가득하구나

가을 햇볕 /고운기

가을 햇볕 고운기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오래 흘러온 강물을 깊게 만들다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여고 2학년 저 종종걸음 치는 발걸음을 붉게 만들다, 묽그스레 달아오른 얼굴은 생살 같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다 그리하여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멀어지려 해도 멀어질 수 없는 우리들의 손을 붙잡게 하고 끝내 사랑한다 한마디로 옹송그린 세월의 어느 밑바닥을 걷게 한다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김용택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김용택 사랑의 온기가 더욱 더 그리워지는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먼 들 끝으로 해가 눈부시게 가고 산 그늘도 묻히면 길가에 풀꽃처럼 떠오르는 그대 얼굴이 어둠을 하얗게 가릅니다 내 안에 그대처럼 꽃들은 쉼없이 살아나고 내 밖의 그대처럼 풀벌레들은 세상의 산을 일으키며 웁니다 한 계절의 모퉁이에 그대 다정하게 서 계시어 한없이 걷고 싶고 그리고 마침내 그대 앞에 하얀 풀꽃 한 송이로 서고 싶어요

가을하늘 /유종인

가을하늘 유종인 하늘이 더 깊어진 것이 아니다 눈앞을 많이 치운 탓이다 밥그릇처럼 뒤집어도 다 쏟아지지 않는 저 짙푸른 늪같이 떨어지는 곳이 모두 바닥은 아니다 열린 바닥이 끝없이 새떼들을 솟아오르게 한다 티 없다는 말, 해맑다는 말! 가을엔 어쩔 수 없다는 말, 끝 모를 바닥이라는 말! 바닥을 친다는 것 고통을 저렇게 높이 올려놓고 바닥을 친다는 것 그래서 살찌고 자란다는 것! 당신이 내게 올 수도 있다는 것 변명은 더 이상 깊어지지 않는다는 것!

가을 저녁의 시 /김춘수

가을 저녁의 시 김춘수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다는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는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거가 버리는가보다

가을저녁에 /소월

가을저녁에 소월 물은 희고 길구나, 하늘보다도 구름은 붉구나, 해보다도. 서럽다, 높아가는 긴 들 끝에 나는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 그늘 깊어 오르는 발 앞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길은 앞으로 키 높은 나무 아래로, 물마을은 성깃한 가지가지 새로 떠오른다 그 누가 온다고 한 언약도 없건마는! 기다려 볼 사람도 없건마는! 나는 오히려 못물가를 싸고 떠돈다 그 못물로는 놀이 잦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