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685

11월의 나무처럼 / 이해인

11월의 나무처럼   이해인​사랑이 너무 많아도사랑이 너무 적어도사람들은 쓸쓸하다고 말하네요​보이게보이지 않게큰 사랑을 주신 당신에게감사의 말을 찾지 못해나도 조금은 쓸쓸한 가을이예요​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내어놓는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욕심의 그늘로 괴로웠던 자리에고운 새 한 마리 앉히고 싶어요​11월의 청빈한 나무들처럼나도 작별 인사를 잘하며갈 길을 가야겠어요

11월의 정거장 /유가형

11월의 정거장  유가형 시면트 담 너머에 오래 전 말라버린마른 나무껍질 같은 낡은 고물이 쌓여 앉았다거북등처럼 갈라진 머리잡초들의 무성한 이야기에11월의 된서리가 내린다추억조차 모두 발라먹은 빈 가슴엔모시 바람 하얗게 사리고 있다비 맞은 골판지처럼 납작해진 늙은이들수직으로 때 묻은 슬픔만 켜켜이 쌓인다무리로 모여 눈 비바람에지난 날 퍼러럭 털고 있다귀 안 윙윙거리던 퇴색된 꿈 후벼내고서로 엉켜 앉아 내 마음의먼 아우스비치로 가는 기차 기다리고 있다

11월의 나팔꽃 /김점희

11월의 나팔꽃 김점희 뉘라서 알 까 베란다 한 켠 여름내 내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쓸모없는 화분이 피워낸 진보라 나팔꽃을 뉘라서 알 까 입동 지나 첫 눈 내린 늦은 11월 임 맞는 시악시 수줍음으로 찬바람이 비워낸 빈 가슴에 진보랏빛 유혹으로 다가온 것을 아픔이어라 가느다란 생명줄 따라 솟아난 잎의 겨드랑이마다 기어이 고통의 나래편 야들한 꽃송이 아쉽다 기댈 곳 없어 뻗지 못한 줄기 되돌아와 제 몸 감고 뒤틀어진 외로움으로 피워낸 눈물꽃이여 빛나라, 11월의 햇살이여 깊게 파인 통꽃 설움의 눈물샘 말려 버리게...

11월, 서시 /이영춘

11월, 서시 이영춘 한 풍경이 걸어 나가고 또 한 풍경이 걸어 들어온다거대한 회전문이 오체투지로 지구를 밀어 올린다“주여, 지난 계절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지구 저 반대 편 시인이 한 계절을 닫고 또 한 계절을 노래하였듯이이 땅에도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고 청춘들이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듯이또 다른 회전문이 열리고 닫힐 것이다가을 이파리 떨어지듯 갈꽃 여자의 머리카락은 수북이 쌓이고별들은 아직 이빨이 돋아나지 않은 아기 웃음소리로 반짝반짝계절을 알릴 것이다그리고 머지않아 지상에는 신의 전령 같은 눈이 내릴 것이다나는 그 눈雪 속에서 더러워진 입술과 탐욕을 버려야 할 것이다“주여! 때가 왔습니다”*나의 계절이 이 땅에서 풍성한 열매와 구름떼 같은 羊의 들판이 되게 하옵소서그리고 마지막 숨 몰아쉬는 시간의..

십일월의 데생 /이규봉​

십일월의 데생 이규봉​계절이 비스듬히 기울어져있다마른 수초가 듬성듬성한 마른 연못엔시월이 동전처럼 가라앉아 있고십일월이 둥둥 떠 있다분수는 분수도 모른 채 춤을 추고비단잉어가 물 위에 떠 있는십일월의 노란 잎사귀를 물어뜯는다제 어미의 죽음이새 어미의 플러그와 아무 접속이 없는데도비단잉어는 가시 지느러미를 곧추세운다  그녀는 문장 끝 물음표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지평보다 낮은 곳을 향하여담담히 제 빛깔로 걸어가고 있다붉은 단풍이 초록 잎에 눈길 주지 않듯이

11월 / 최의상

11월   최의상으스스한 오후바람은 퇴락하는 마지막 잎을조용히 흔들어 준다.오색 단풍의 영광은 사라지고차디찬 대지에 낙엽으로 남는다.사랑이 아직도 남은 심장소리를쓸쓸한 인적이 밟고 가며 듣는다.사랑을 노래한다.인생이 쓸쓸하다.가을이 아름다우나 슬프기만 하다.낙엽을 밟으며 이 아름다운 시간에서 있는 자신을 돌아본다.삭정이 끝 멀리 파란 하늘 바라보며십일월 만추의 바람결이가슴으로 깃들며 심령을 흔든다.지나온 세월을 문득 생각하니감사가 마음에서 싹튼다.기도 하고 싶은 계절이다.

가을 하늘 / 박재삼

가을 하늘   박재삼온 산천이 푸르른 녹음만으로 덮쳐그것이 오직 숨차기만 하더니,바람도 그 근처에 와서헉헉거리기만 하더니,이제는 그 짓도 지쳤는지울긋불긋노란 빛으로혹은 붉은 빛으로부지런히 수를 놓고 있고,거기 따라바람도 상당히 기가 죽어달래기만을 연출하고 있구나.해마다 겪는 이 노릇을완전히 파악하기는커녕우리도 어느새 단풍이 들어땅에 묻힐 일만이 빤히 보이는아, 가을 하늘이 끝간대 없이높게 높게결국 아득하게 개였네.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 /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   박재삼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저것 봐, 저것 봐,네 보담도 내 보담도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