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698

11월 / 최의상

11월   최의상으스스한 오후바람은 퇴락하는 마지막 잎을조용히 흔들어 준다.오색 단풍의 영광은 사라지고차디찬 대지에 낙엽으로 남는다.사랑이 아직도 남은 심장소리를쓸쓸한 인적이 밟고 가며 듣는다.사랑을 노래한다.인생이 쓸쓸하다.가을이 아름다우나 슬프기만 하다.낙엽을 밟으며 이 아름다운 시간에서 있는 자신을 돌아본다.삭정이 끝 멀리 파란 하늘 바라보며십일월 만추의 바람결이가슴으로 깃들며 심령을 흔든다.지나온 세월을 문득 생각하니감사가 마음에서 싹튼다.기도 하고 싶은 계절이다.

가을 하늘 / 박재삼

가을 하늘   박재삼온 산천이 푸르른 녹음만으로 덮쳐그것이 오직 숨차기만 하더니,바람도 그 근처에 와서헉헉거리기만 하더니,이제는 그 짓도 지쳤는지울긋불긋노란 빛으로혹은 붉은 빛으로부지런히 수를 놓고 있고,거기 따라바람도 상당히 기가 죽어달래기만을 연출하고 있구나.해마다 겪는 이 노릇을완전히 파악하기는커녕우리도 어느새 단풍이 들어땅에 묻힐 일만이 빤히 보이는아, 가을 하늘이 끝간대 없이높게 높게결국 아득하게 개였네.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 /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   박재삼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저것 봐, 저것 봐,네 보담도 내 보담도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겄네.

불타는 단풍 / 김소엽

불타는 단풍   김소엽당신이 원하시면여름날 자랑스러웠던 오만의푸르른 색깔과무성했던 허욕의 이파리들도이제는 버리게 하소서혈육이 가지를떠나빈 몸으로당신 발 아래 엎드려허망의 추억까지도당신께 드리오리니당신의 피로 물들여 주소서바람이 건듯 불면당신의 음향으로내 젖은 영혼이 떨게 하시고노을이 찾아들면육신은 더욱 고운 당신빛으로황홀한 색채를 띠게 하소서푸르른 나는 가버리고내 안에 당신이 뜨겁게 살아서죽어도 영원히 살아있게 하시고머언 훗날어느 순결한 신부의일기장 속에 연서로 남아당신의 사랑으로 물드는한 장불타는 단풍이게 하소서.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의 기도   김현승가을에는기도하게 하소서……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가을에는사랑하게 하소서……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시간을 가꾸게 하소서.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나의 영혼,굽이치는 바다와백합의 골짜기를 지나,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 억새 / 정일근

가을 억새 / 정일근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가스등 켜진 추억의 플랫홈에서마지막 상행성 열차로 그개를 떠나보내며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겠는가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싶은 것이다

가을 기도 / 유안진

가을 기도  유안진불러주세요서리치면 쓰러질들풀같이 여린 내 이름을찬비 내리는 가을밤에는불빛처럼 불러주세요나그네도 서둘러고향으로 돌아가듯이고향집 따순 아랫목에지친 머리 뉘이듯이먼지 쌓인 복음책으로저를 불러주세요손때 묻고 어룽진 어느 행간에서낙옆처럼 엎드려붉게 붉게 울도록오오 하나님가을에는 가을에는제 고향 말씀책으로저를 오라 불러주세요

노숙 / 박진성

노숙           박진성  십일월 은행잎에 누웠다새벽 고요 부서지는 소리응급실보다 환했다아스팔트 뒤덮은 잎맥들은 어느 나라로 가는 길인가등짝에 달라붙은 냉기를 덥히느라 잎들은분주하다 갈 곳 없는 내력들처럼잎잎이 뒤엉킨 은행잎 사원에서 한참을 잤다사랑할 수 없다면 마지막 길도 끊어버리겠다은행잎 한 잎, 바스라져 눈가에 떨고 있었다

10월의 사흘 / 이선이

10월의 사흘                             이선이                             겸허한 새벽이 너에게로부터 왔다                            마당의 감나무 첫잎이 질 무렵                            수많은 잎사귀들이 죽음에 무심한 동안                            삶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생에 무엇이 올 것인지                            혹은 무엇이 오지 않을 것인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