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698

시월 이야기 / 이향지

시월 이야기   이향지만삭의 달이소나무 가지에서 내려와벽돌집 모퉁이를 돌아갑니다조금만 더 뒤로 젖혀지면계수나무를 낳을 것 같습니다계수나무는 이 가난한 달을엄마 삼기로 하였습니다무거운 배를 소나무 가지에 내려놓고모로 누운 달에게"엄마"라고 불러봅니다달의 머리가 발뒤꿈치까지 젖혀지는 순간이 왔습니다아가야아가야 부르는 소리골목을 거슬러 오릅니다벽돌집 모퉁이가 대낮 같습니다

시월에 /문태준

시월에                            문태준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 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

밀림 도서관 / 최준

밀림 도서관  최준  추장이 죽었다 9월새들의 비망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먹구름을 끌고마지막 벌크선이 사라진 행간으로 비가 내렸다눈 먼 나무들이 나이테를 배회하는 동안추장의 빈소, 도서관 가는 길은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아서 지워져 버렸나천둥과 번개의 두근거림만으로도슬픔은 한이 없었다너무 긴 우기였다고, 헐거워진 창틀마다이마에 화살 맞은 원숭이들이바나나 잎 가면을 쓰고 앉아 책장을 넘겼다문 잠긴 장서고는 꼬리처럼 어두웠다반년에 걸친 추장의 장례식이 끝난 건 새들의 비망록 속 비밀지도가 날개를 잃고멍청한 얼굴로 도보여행을 시작한 3월이었다도서관을 리모델링하려는공공연한 도벌이 다시 시작되었지만추장의 죽음은 발설되어서는 안 될영원한 비밀결코 회자되지 못할 새들의 비망록도추장이 죽었다,로끝나버리고

고등어 산다 / 나태주

고등어 산다  나태주  맨드라미 피어서 붉은9월도 초순의 저녁 무렵제민천 따라서 자전거 타고하루도 저물어 집에 가다간고등어 안동 간고등어네 손에 만 원 외치는 소리자전거 내려서 고등어 산다 집에 가지고 가보았자먹을 입도 없는데 뭘이런 거 사 왔느냐 집사람핀잔하고 외면할지 몰라도어려서 외할머니 밥상에서수저에 얹어 주시던 고등어문득 생각나서 고등어 산다

9월의 시 / 조병화

9월의 시   조병화                          인간은 누구나스스로의 여름만큼 무거워지는 법이다스스로 지나온 그 여름만큼그만큼 인간은 무거워지는 법이다 또한 그만큼 가벼워지는 법이다그리하여 그 가벼운만큼 가벼이가볍게 가을로 떠나는 법이다기억을 주는 사람아기억을 주는 사람아여름으로 긴 생명을이어주는 사람아바람결처럼 물결처럼여름을 감도는 사람아세상사 떠나는 거비치파라솔은 접히고 가을이 온다

9월의 시/이해인

9월의 시 이해인   저 찬란한 태양마음의 문을 열어 온 몸으로 빛을 느끼게 하소서 우울한 마음어두운 마음모두 지워버리고 밝고 가벼운 마음으로9월의 길을 나서게 하소서 꽃 길을 거닐고높고 푸르른 하늘을 바라다 보며자유롭게 비상하는꿈이 있게 하소서 꿈을 말하고꿈을 쓰고꿈을 노래하고꿈을 춤추게 하소서 이 가을에떠나게 말게 하시고 이 가을에사랑이 더 깊어지게 하소서

9월 /이기철

9월 이기철 무언가 하나만은 남겨놓고 가고 싶어서구월이 자꾸 머뭇거린다꿈을 접은 꽃들 사이에서나비들이 돌아갈 길을 잃고 방황한다화사했던 꿈을 어디다 벗어놓을까꽃들이 제 이름을 빌려 흙에 서명한다아픈 꿈은 얼마나 긴지그 꿈 얼마나 여리고 아픈지아직도 비단벌레 한 마리풀잎 위에 영문 모르고 잠들어 있다나뭇잎이 손가락을 펴벌레의 잠을 덮어주고 있다잘못 온 게 아닌가작은 바람이 생각에 잠긴다급할 것 없다고, 서두르지 말라고올해는 아직도 많이 남았다고바람에 씻긴 돌들이 깨끗해진다여름이 재어지지 않는 큰 팔을 내리고옷이 추울까 봐 나뭇잎을 모아제 발등을 덮는다

9월의 시 /문병란

9월의 시  문병란9월이 오면해변에선 벌써이별이 시작된다나무들은 모두무성한 여름을 벗고제자리에 돌아와호올로 선다누군가 먼 길 떠나는 준비를 하는저녁, 가로수들은 일렬로 서서기도를 마친 여인처럼고개를 떨군다울타리에 매달려전별을 고하던 나팔꽃도때묻은 손수건을 흔들고플라타너스 넓은 잎들은무성했던 여름 허영의 옷을 벗는다후회는 이미 늦어버린 시간먼 항구에선벌써 이별이 시작되고준비되지 않은 마음눈물에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