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686

비로 만든 집 / 류시화

비로 만든 집   류시화  비로 만든 집에서나는 살았네안개로 만든 집구월의 오솔길로 만든 집구름비나무로 만든 집비로 만든 집에는 언제나비가 내리지비를 내리는 나무비를 내리는 길비를 내리는 염소들세상이 슬픔으로 다가올 때마다 나는그곳으로 가서 비를 맞았네비의 새가 세상의 지붕 위를 날고비를 내리는 오솔길이비의 나무를 감추고 있는 곳비로 만든 집에서나는 살았네비의 새가 저의 부리로비를 물어 나르는 곳세상 어디로도 갈 곳이 없을 때 나는그곳으로 가서 비를 맞았네비로 만든 집에는언제나 비가 내리지비를 내리는 나무비를 내리는 길비를 내리는 염소들

꽃무릇 / 성영희

꽃무릇   성영희  무리를 지으면 쓸쓸하지 않나절간 뜰을 물들이며 흘러나간 꽃무릇이산언덕을 지나 개울 건너울창한 고목의 틈새까지 물들이고 있다여린 꽃대 밀어 올려왕관의 군락을 이룬 도솔산 기슭꽃에 잘린 발목은 어디 두고붉은 가슴들만 출렁이는가제풀에 지지 않은 꽃이 있던가그러니, 꽃을 두고 약속하는 일그처럼 헛된 일도 없을 것이지만저기, 천년 고찰 지루한 부처님도해마다 꽃에 불려나와객승과 떠중이들에게 은근하게파계를 부추기는지도 모르는 일이다어느 화사한 말이든무릇을 앞뒤로 붙여허망하지 않은 일 있던가꽃이란 무릇, 홀로 아름다우면 위험하다는 듯같이 피고 같이 죽자고구월의 산문(山門)을 끌고꽃무릇, 불심에 든 소나무들 끌고 간다

다시 9월/ 나태주

다시 9월    나태주                                                  기다리라 오래 오래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지루하지만 더욱 이제 치유의 계절이 찾아온다   상처받은 짐승들도 제 혀로 상처를 핥아 아픔을 잊게 되리라   가을 가을들은  봉지 안에서 살이 오르고 눈이 밝고 다리 굵은 아이들은 멀리까지 갔다가 서둘러 돌아오리라   구름 높이 높이 떴다 하늘 한 가슴에 새하얀 궁전이 솟아올랐다   이제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게 되는 시간 기다리라 더욱 오래 오래 그리고 많이.

늦여름 /심호택​

늦여름  심호택​ 까막까치 대가리뿐 아니라개 잔등이 소 엉덩이도 벗어지게 생긴 날때 넘겨 돌아와찬물에 밥 말아 먹고마룻장 짊어지면 살 것 같지요 쉬파리 똥파리와 싸우며소르르 낮잠 한소금 꿀맛이지만가시를 머금은 듯 잠결에도더운 들에 엎드린 식구들 생각가여워라 가여워라 매미들 울지요 잘잤다 눈 비비고 일어나면미루나무 그림자 늘어난 텃밭에가을 온다 가을 온다싸움터 하늘 비행기처럼고추잠자리 어지러이 떠다니지요

여름의 끝자락 /정명화

여름의 끝자락  정명화 코스모스 꽃잎에고추잠자리 기웃거리고조석으로 시원한 바람에그대의 계절이 오고 있어요 앞마당에 곱게 핀백일홍이 호랑나비 초대하고맨드라미꽃은 그대 마음 훔쳐붉게 물들어 가고 있어요 귀뚜라미 노랫소리 듣고 싶어도자기 항아리 준비해 놓고지붕 위에 실하게 영글어 가는 박가을을 기다리고 있나 봐 찬란한 여름도 가을 앞에서힘없이 떠나갈 채비하고여름의 끝자락을 잡고, 나는가을을 채우려 부지런히 비우고 있어요.

여름이 떠나가며 /정상만

여름이 떠나가며  정상만 매미의 애절한 마지막 절규가세상을 향한 목놓음으로 울려질 때면떠나는 이의 마지막 발걸음 되어석양의 빛 속으로 조용히 사라진다 처음 왔던 그리운 그 길 따라말없이 돌아가는 서글픈 발걸음에예쁜 꽃잎 한 아름을 흩뿌려놓고고운 발걸음 떠나간 그 길 따라 다시 찾아와 주기를 기다려본다 여름이 가는 소리에 가을을 맞이하듯이서녘 하늘의 석양이 붉게 물들어 간다 귀뚜라미의 청량한 노랫소리가가을의 문 앞에서 수더분한 미소를 지어본다

여름이 떠나가네 /김인숙

여름이 떠나가네 김인숙 여름이 떠나려 하니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밤새도록귀뚜리의 노래는울어도 다 못할 애끓는 노래떠나는 사랑 잡을 수 없는안타까운 그리움 차라리미련도 후회도 떨치고 싶은꿈꾸는 가을의 노래 귀뚜루루 귀뚜루루 귀뚜루루어서 가까이 더 오시오나 그대와 더불어 이 한 날을슬퍼도 즐거이노래 부르고 싶소

성숙해진 늦여름 /김재덕

성숙해진 늦여름       김재덕 삶이 질퍽거린다고 울상이던 낯짝이 누렇게 떠서인지 고개를 못 드는 벼 이삭은 겨우 울보 매미를 배웅했건만 가을의 노래밖에 할 줄 모른다는 귀뚜라미 마중하려니 코로나에 지친 허수아비가 눈에 밟힌다 곧 참새가 떼 지을 것을 안 농부의 고래고래도 귀청 따가울 건데 가뜩이나 힘겨운 허수아비의 누더기까지 찢어지겠다만 어수선한 세상이라도 할 일들 해야겠지.. 어라, 마른하늘 날벼락 친다. 산모롱이에선 아들딸 낳는 밤송이 산통에 고슴도치 될 청개구리 어쩌라고 호랑이 장가가는 걸까 휘둥그레 비구름 뚫은 해님이 을씨년스러운 오늘따라 옛사랑 만나듯 반가워도 짓궂을 햇살 때문에 육수를 꽤 흘리겠다 그나저나, 늦여름이 농익는데도 아직 시뻘겋게 달아오르지 않은 고추잠자리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