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695

논물 드는 5월에/ 안도현

논물 드는 5월에 안도현 그 어디서 얼마만큼 참았다가 이제서야 저리 콸콸 오는가 마른 목에 칠성사이다 붓듯 오는가 저기 물길 좀 봐라 논으로 물이 들어가네 물의 새끼, 물의 손자들을 올망졸망 거느리고 해방군같이 거침없이 총칼도 깃발도 없이 저 논을 다 점령하네 논은 엎드려 물을 받네 물을 받는, 저 논의 기쁨은 애써 영광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것 출렁이며 까불지 않는 것 태연히 엎드려 제 등허리를 쓰다듬어주는 물의 손길을 서늘히 느끼는 것 부안 가는 직행버스 안에서 나도 좋아라 金萬傾 너른 들에 물이 든다고 누구한테 말해주어야 하나, 논이 물을 먹었다고 논물은 하늘한테도 구름한테도 물을 먹여주네 논둑한테도 경운기한테도 물을 먹여주네 방금 경운기 시동을 끄고 내린 그림자한테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누..

5월 편지/ 도종환

5월 편지 도종환 붓꽃이 핀 교정에서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떠나고 없는 하루 이틀은 한 달 두 달처럼 긴데 당신으로 인해 비어 있는 자리마다 깊디깊은 침묵이 앉습니다 낮에도 뻐꾸기 울고 찔레가 피는 오월입니다. 당신 있는 그곳에도 봄이면 꽃이 핍니까 꽃이 지고 필 때마다 당신을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반짝이며 찔레가 피는 철이면 더욱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다 그러하겠지만 오월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가 많은 이 땅에선 찔레 하나가 피는 일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세상 많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사랑하여 오래도록 서로 깊이 사랑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생각을 하며 하늘을 보면 꼭 가슴이 메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서로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고 너무도 ..

5월/ 조병화

5월 조병화 스물을 갓 넘은 여인의 냄새를 온몸에 풍기며 온갖 꽃송이들이 물 돋은 대지에 나무 가지 가지에 피어난다. 흰구름은 뭉게뭉게 라일락의 숫푸른 향기를 타고 가도가도 고개가 보이지 않는 푸른 먼 하늘을 길게 넘어간다. 아, 오월은 여권도 없이 그저 어머님의 어두운 바다를 건너 뭣도 모르고 내가 이 이승으로 상륙을 한 달 해마다 대지는 꽃들로 진창이지만 까닭 모르는 이 허전함 나는 그 나른한 그리움에 취한다. 오, 오월이여

4월이 가면 /손정봉

4월이 가면 손정봉 4월이 가면 나의 봄도 함께 가야지 미풍은 귓가에서 멀어지고 진달래 향기는 초록에 스러지다 아! 4월의 마지막 땅거미도 없는 그 끝자락에 찬란하게 떠나는 너를 위해 웃음꽃으로 주단을 깔아 주리라 길게 늘어진 당신의 그림자에 행운의 머리핀 하나 꽂아 주리라 4월이 가면 남은 계절은 걸어서 가자 저 황량한 여름을 맨발로 걸어서 또 걸어서 내 지친 삶의 발바닥에 굳은살은 더욱 더 단단해지고 좀 더 성숙해진 나는 가난한 자의 여유로움으로 살아가리라 4월이 가면 나의 상념은 잠시 오수를 즐기고 층층나무를 무심히 오르내리는 개미들에게 나의 봄을 눈물로 보내지 않은 이유를 천천히 이야기하리라

4월은 갈아엎는 달 /신동엽

4월은 갈아엎는 달 신동엽 내 고향은 강 언덕에 있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가난 지금도 흰 물 내려다보이는 언덕 무너진 토방가선 시퍼런 풀줄기 우그려넣고 있을 아, 죄없이 눈만 큰 어린 것들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산천은 껍질을 찢고 속잎은 돋아나는데 4월이 오면 내 가슴에도 속잎은 돋아나고 있는데 우리네 조국에도 어느 머언 심저心底, 분명 새로운 속잎은 돋아오고 있는데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의 함성 광화문서 목 터진 4월의 승리여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 이 균스러운 부패와 향락의 불야성 갈아엎었으면 갈아엎은 한강船岸에다 보리를 뿌리면 비단처럼 물결칠, 아 푸른 보리밭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4월의 꽃 / 신달자

4월의 꽃 신달자 홀로 피는 꽃은 그저 꽃이지만 와르르 몰려 숨 넘어가듯 엉겨 피어 쌓는 저 사건 뭉치들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벚꽃 철쭉들 저 집합의 무리는 그저 꽃이 아니다 우루루 몰려 몰려 뜻 맞추어 무슨 결의라도 하듯이 그래 좋다 한마음으로 왁자히 필 때까지 피어보는 서럽고 억울한 4월의 혼령들 잠시 이승에 불러 모아 한번은 화끈하게 환생의 잔치를 베풀게 하는 신이 벌이는 4월의 이벤트

4월의 풀 /천양희

4월의 풀 천양희 빈 들판 위를 찌르는 바람같이 우리도 한동안 그렇게 떠돌았다 불의의 연기 한가닥 피워 올리며 완강하게 문닫는 세상의 어느 곳인가 안과밖의 고리는 끊어지고 저 얼었다 녹는 강물 바다에 몸 섞어 떠밀릴 때마다 낮은 언덕 굽은 등성이에 한줄 마른 뼈로 엎드려 구름 낀 세상 낭패하며 바라본다 오늘도 허기진 하루 4월의 모랫바람 사정없이 불어와 취객의 퇴근길 앞은 잘 보이지 않고 밟혀도 밟혀도 되살아 나는 키 작은 풀이 되어 뿌어연 가로등 밑을 묵묵히 걸어간다

4월 엽서 /정일근

4월 엽서 정일근 막차가 끝나기 전에 돌아가려 합니다 그곳에는 하마 분분한 낙화 끝나고 지는 꽃잎 꿏잎 사이 착하고 어린 새 잎들 눈뜨고 있겠지요 바다가 보이는 교정 4월 나무에 기대어 낮은 휘파람 불며 그리움이 시편들을 날려보내던 추억의 그림자가 그곳에 남아 있습니까 작은 바람 한 줌에도 온 몸으로 대답하던 새 잎들처럼 나는 참으로 푸르게 시의 길을 걸어 그대 마을로 가고 싶었습니다 날이 저물면 바다로 향해 난 길 걸어 돌아가던 옛집 진해에는 따뜻한 저녁 불빛 돋아나고 옛 친구들은 잘 익은 술내음으로 남아 있겠지요 4월입니다 막차가 끝나기 전에 길이 끝나기 전에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