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시월의 사유 /이기철

종이연 2024. 10. 21. 21:47

시월의 사유

 

이기철

 

텅 빈 자리가 그리워 낙엽들은 쏟아져 내린다

극한을 견디려면 나무들은 제 껍질을 튼튼히 쌓아야 한다

저마다 최후의 생을 간직하고 싶어 나뭇잎들은

흙을 향하여 떨어진다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나무들이 가장 그리워했던 부분을 기억하려고 나무를 만진다

차가움에서 따스함으로 다가오는 나무들

모든 감각들은 너무 향기 쪽으로 기울어 있다

엽록일까 물관일까, 향기를 버리지 않으면 나무들은 삭풍을 이기지 못한다

어두워야 읽히는 가을의 문장들, 그 상형문자들은 난해하다

더러 덜컹거리는 문짝들도 제자리에 머물며 더 깊은 가을의 심방을 기다린다

나뭇잎들, 저렇게 생을 마구 내버릴 수 있다니, 그러니까 너희에게도 생은 무거운 것이었구나

나는 면사무소 정문으로 한 노인이 자전거를 끌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 사람이 나뭇잎보다 더

가벼워질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며 염소들이 지나간 길을 골라 걷는다

가벼운 것들

뽕나무잎 누에고치 거미줄 잠자리 제비집 종이컵 볼펜 다 읽은 시집들

그러나 나를 짓누르는 것들, 무거운 것들

불면증 서문시장 팔공산 조지 부시 아프간 전쟁 매리어트 호텔 영변 경수로 김정일 인천공항

유에스 달러

 

면사무소 은행나무 위에도 가을이 오고

이제 무들은 더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병든 새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어서 집을 지어야 한다

이 주식의 가을에 사람들은 끝없이 회의를 하고

나뭇잎은 아무 것도 추억하지 않는다

은행나무가 그렇듯이, 염소가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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