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710

봄이 오는 길목에서 / 이해인

봄이 오는 길목에서 이해인 하얀 눈 밑에서도 푸른 보리가 자라듯 삶의 온갖 아픔 속에서도 내 마음엔 조금씩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꽃을 피우고 싶어 온몸이 가려운 매화 가지에도 아침부터 우리집 뜰 안을 서성이는 까치의 가벼운 발결움과 긴 꼬리에도 봄이 움직이고 있구나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내 마음의 바위 틈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일어서는 봄과 함께 내가 일어서는 봄 아침 내가 사는 세상과 내가 보는 사람들이 모두 새롭고 소중하여 고마움의 꽃망울이 터지는 봄 봄은 겨울에도 숨어서 나를 키우고 있었구나.

이른 봄 저녁 무렵 / 정희성

이른 봄 저녁 무렵 정희성 이른봄 저녁 무렵 새로 나온 이시영 시집을 읽으며 그 행간에 자리잡은 적요에 잠겨 눈을 지그시 감다가 문득 놀라 창문 열고 내다보니 언제 지었을까 아직 새 잎 돋지 않은 가문비나무 우듬지에 얼기설기 얽어놓은 까치 둥우리 새는 보이지 않고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나는 하늘빛 고요 옳거니! 세상의 소란이 나를 눈감게 하고 저 고요가 나를 눈뜨게 하느니

지상의 봄 / 강인한

지상의 봄 강인한 별이 아름다운 건 걸어야 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 부서지고 망가지는 것들 위에 다시 집을 짓는 이 지상에서 보도 블록 깨어진 틈새로 어린 쑥잎이 돋아나고 언덕배기에 토끼풀은 바람보다 푸르다. 허물어진 집터에 밤이 내리면 집 없이 떠도는 자의 슬픔이 이슬로 빛나는 거기 고층 건물의 음흉한 꿈을 안고 거대한 굴삭기 한 대 짐승처럼 잠들어 있어도 별이 아름다운 건 아직 피어야 할 꽃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2023,3,27)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 8,7) 주님! 제 가슴에 돌덩이를 품고 살아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돌덩이로 오히려 저 자신이 짓눌려 있지 않게 하소서. 돌덩이를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품고 만지작거리게 하소서. 위하는 마음을 품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위로하고 축복하고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이영근 신부님

봄을 기다리며 / 양현근

봄을 기다리며 양현근 스물스물 쓸쓸한 감성이 담벼락 한 귀퉁이 남루한 전단지에 갇혀있습니다 스물스물 젖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눈길을 거두어도 오래 잊혀지지 않는 것들은 모두 눅눅한 빛깔입니다 울어 버리든가 아니면 조심스럽게 불러보아도 따뜻한 웃음은 조립될 수 없습니다 허술한 마음의 이음새마다 푸른 별들은 초저녁부터 못을 박아대고 오늘 밤은 먼 곳에서 불쑥 달려올지도 모를 그리운 날들을 위하여 잎넓은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밝은 꽃등 하나 그렇게 밤새 밝혀두렵니다 세상은 그렇게 이유없이 밝아올 겁니다.

봄볕 속의 길 / 조태일

봄볕 속의 길 조태일 구겨진 마음들을 어서 어서 펴서 아른아른한 아지랑이 부드럽게 춤추며 봄볕 속의 길로 나서자. 착하고 격렬했던 뜻들을 서로 나누어 가지며 너와 나의 길 가릴 것 없이 우리들의 길로 한데 합쳐서 손에 손에 자식들을 이끌어 한형제로 앞서가며 뒤서가며 마음을 활짝 열어 깨어나는 생명들의 소리를 듣자. 파고다공원에 내리는 봄볕도 수유리 4.19 기념탑에 내리는 봄볕도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추나니, 춤을 추나니.

봄날,사랑의 기도 / 안도현

봄날,사랑의 기도 안도현 봄이 오기 전에는 그렇게도 봄을 기다렸으나 정작 봄이 와도 저는 봄을 제대로 맞지 못했습니다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소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로 해서 이 세상 전체가 따뜻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갓 태어난 아기가 응아,하는 울음소리로 엄마에게 신호를 보내듯 내 입 밖으로 나오는 사랑해요,라는 말이 당신에게 닿게 하소서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남의 허물을 함부로 가리키던 손가락과 남의 멱살을 무턱대고 잡던 손바닥을 부끄럽게 하소서 남을 위해 한 번도 열려본 적이 없는 지갑과 끼니때마다 흘러 넘쳐 버리던 밥이며 국물과 그리고 인간에 대한 모든 무례와 무지와 무관심을 부끄럽게 하소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하소서 큰 것..

이 봄의 축제 / 김종해

이 봄의 축제 김종해 그대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나 그대 뜻에 따라 이 봄에 풀잎은 일어서고 꽃들은 하늘에다 오색 종이를 날린다 일어선 풀잎 하나만 보아도 눈물나는 이 봄에 황사는 자욱하게 하늘을 가리고 일어서라일어서라일어서라고 누가 외치지 않아도 저 하찮은 들꽃들마저 일어서서 하늘에다 오색 등불을 매단다 嚴冬에 엎드려 숨죽이던 것들아 척박한 황지에 뿌리내린 쑥맥들아 누가 오늘의 이 축제를 숨어서 구경하랴 그대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나 그대 뜻에 따라 이 봄에 나도 풀잎으로 일어서서 황사 흩날리는 하늘에다 새를 날린다 아아, 이름을 짓지 않은 한 마리의 새를!

봄 편지 / 이효녕

봄 편지 / 이효녕 얼었던 땅위에 아지랑이 눈 속에 잠자던 하얀 꿈을 부르니 문을 열면 앞산이 달려와 내 가슴 어느 듯 흔든다 부드러운 사랑만큼 순한 미풍 눈을 뜨고 눈을 감고 내게 걸머진 삶의 무게 남쪽 향해 허리 굽힌다 잃어버린 길을 찾아와 기웃거리며 기도로 머물어 다시 햇볕을 소유한 하늘 몇 평 봄날은 그대 가슴에 가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