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710

다시금 봄날에 / 김남조

다시금 봄날에 / 김남조 가랑잎 나의 영혼아 만국(晩菊) 한 송이 물오리처럼 목이 시린 조락의 뜰에 너 함께나도 볼이 젖는다 그 전날 그 푸른 산바람 해설픈 초원에 떠놀던 여른여른 눈여린 고운 불수레 하며 멀리 메아리져서 돌아들 오던 그리운 노래 그리운 이름 펴며 겹치며 드높이 손짓하는 송이 송이 탐스런 떼구름들 네가 그들을 얼마나 가슴 바쳐 사랑했음인가를 내가 안다 지금은 땅에 떨어져 매운 돌부리에 찢기우는 너여 가랑비 보슬보슬 내림과 같고 소물소물 살눈썹이 웃음과 같은 네 달가운 모든것 오직 그들 호사스런 계절의 풍요한 아름다움 앞에 바친 푸른 찬가 헌신이던걸 내가 안다 그러나 지금은 가야지 지금은 누감고 고이 가야지 지열이 돌아오는 어느 봄날에 다시금 어린아이처럼 손 흔들며 깨어나리라 찬서리 소리도..

해마다 봄이되면 / 조병화

해마다 봄이되면 조병화 해마다 봄이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뚝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봄비 오던 날 / 최옥

봄비 오던 날 최옥 혼잣말을 합니다 그대가 나를 조금만 자유롭게 하기를 그렇게 하기를... 가두었던 말(言)들을 빗물속에 흘려 보냅니다 구름처럼 먼 데 둘 수밖에 없는 사랑 수평선처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그대 한때 당신을 향했던 불같은 몸살도 이제는 편안해진 그리움이길 재울 것은 재우고 깨울 것은 깨우며 봄비속에 연신 혼잣말을 합니다 가두었던 말(言)들을 풀어줍니다

봄비 1 -추억의 봄비. / 강해산

봄비 1 -추억의 봄비. 강해산 저기 비가 오네요. 기나긴 외로움 속에서 지쳐버린 마음에 아련한 추억을 적셔 주네요. 한동안 잊었던 당신의 아름다운 사랑이 창을 두드리는 빗방울처럼 귓전에 맴돌아가고 참을 수 없는 그리움에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빗물 되어 흘러내리네요. 겨우내 추위에 굳어버린 추억에서 사라진 내가 세상에는 없는 당신을 잊을까봐 해마다 사월이 오면 당신은 봄비 되어 내 마음 속에 내리네요.

봄비 / 고정희

봄비 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봄비 / 노천명

봄비 노천명 강에 얼음장 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가슴속 어디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봄이 온다기에 밤새껏 울어 새일 것은 없으련만 밤을 새워 땅이 꺼지게 통곡함은 이 겨울이 가는 때문이었습니다 한밤을 줄기차게 서러워함은 겨울이 또 하나 가려 함이었습니다 화려한 꽃철을 가져온다지만 이 겨울을 보냄은 견딜 수 없는 비애였기에 한밤을 울어울어 보내는 것입니다

봄비 / 변영로

봄비 변영로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아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앞에 자지러지노라!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누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봄 / 이성부

봄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 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