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가 바로 저긴데 / 이은상 고지가 바로 저긴데 이은상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위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피 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좋은 시 느낌하나 2023.02.16
겨울 산에서 /이해인 겨울 산에서 이해인 추억의 껍질 흩어진 겨울 산길에 촘촘히 들어앉은 은빛 바람이 피리 불고 있었네 새 소리 묻은 솔잎 향기 사이로 수없이 듣고 싶은 그대의 음성 얼굴은 아직 보이지 않았네 시린 두 손으로 햇볕을 끌어내려 새 봄의 속옷을 짜는 겨울의 지혜 찢어진 裸木(나목)의 가슴 한켠을 살짝 엿보다 무심코 잃어버린 오래 전의 나를 찾았네 좋은 시 느낌하나 2023.02.15
겨울산을 오르며 /김주안 겨울산을 오르며 김주안 눈이 내린 산길을 오른다 아직도 붉은 언어로 남아 있는 팥배나무 벼랑에 서서 가을을 채우던 다람쥐들 엄숙하던 삶들이 때때로 눈속에 갇혀있다 제대로 꼭대기까지 오른 적이 없는 산 오르다 힘들면 바위에 마음을 널어놓고 내가 걸어 온 길의 끝을 생각하며 흰눈을 누더기로 걸친 겨울나무의 삶과 숲을 따라 발자국을 남긴 새들을 궁금해 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랑 겨울 숲을 따라 간 것은 아닐까 저 산모퉁이 돌면 보이지 않는 시간 찾아 갈 수 있을까 바람이 가는 길 물을 수 있을까 오를 수록 깊어지는 산길 질퍽거리는 발자국소리 너에게로 가는 길은 아직도 숨이 차다 좋은 시 느낌하나 2023.02.14
겨울 산에서 /류인순 겨울 산에서 류인순 날을 세운 칼바람에 야윈 몸 휘청이는 애처로운 잎새 하나 거센 눈보라에 어깨 마구 짓눌려 때때로 속울음 울지만 꿈꾸는 내일이 있어 칼바람 속에서도 묵묵히 버티고 있네 능선 때리던 매운바람 울다 지치는 날 명주바람 앞세우고 새벽이슬 밟으며 다시 올 연둣빛 봄 기다리며. 좋은 시 느낌하나 2023.02.13
겨울 산 /엄영란 겨울 산 엄영란 숲을 따라 올라갑니다. 나뭇잎 흔들리던 소리가 나무 아래 쉬고 있습니다. 새가 앉았던 자리를 안고 나무는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집을 버린 새들의 집이 텅 비어 있습니다. 허공을 맴돌던 새 한 마리가 허공 속으로 날아갑니다. 발아래 흙들이 스멀거리고 마른 풀잎이 수런거립니다. 바람이 붑니다. 산허리를 감고 문득 길이 꺾어집니다. 그 너머의 나무가 눈을 벗어납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더듬어 가는 나의 밑바닥부터 숨이 차 오릅니다. 흐르는 물에 목을 축입니다. 가시가 무디어지지 않은 망개 넝쿨이 나무와 나무를 얼기설기 감고는 물기가 빠져나간 몸을 버티고 있습니다. 비탈길에서는 몸이 기우뚱거립니다. 썩지 못한 낙엽이 제멋대로 뒹굴다 멈추어 섭니다. 내 안에서 썩다 남은 것들이 소리를 .. 좋은 시 느낌하나 2023.02.12
달/ 박목월 달 박목월 배꽃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경주군 내동면 혹은 외동면 불국사 터를 잡은 그 언저리로 배꽃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좋은 시 느낌하나 2023.02.11
달/ 김동명 달 김동명 달은 황혼과 함께 언제까지나 믿어도 좋을 나의 친구다 이들밖에 실로 내 집을 찾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달은 저의 가난한 친구를 위하여 백금의 모전毛氈을 가져다가 나의 뜰에 깔아준다 나는 제왕 같이 그 위를 거닐며 나의 성대한 아침을 꿈꾼다 좋은 시 느낌하나 2023.02.10
낮달의 비유/ 문태준 낮달의 비유 문태준 내 목숨이 서서히 무너지고 싶은 곳 멀리서 온 물컹물컹한 소포 엷은 창호문과 성글은 울 찬물 한 그릇이 있는 마루 꽃도 새도 사람도 물보다 물렁하게 쥐었다 놓는, 식었던 아궁이가 잠깐만 환한, 내 귓속에 맑게 흐르는 이별의 말 자루에서 겨처럼 쏟아져 내리다 흰빛이 된 말 좋은 시 느낌하나 2023.02.09
겨울산 /조재훈 겨울산 조재훈 날은 저물고 이름 모를 어린 새 한 마리 겨울산을 넘는다. 가파른 벼랑 쉬지도 못하고 꺼이꺼이 울며 장군처럼 버티고 선 겨울산을 넘는다. 집집마다 꽁꽁 문은 잠기고 대추나무 끝에 찢겨져 연이 울 뿐. 어깻죽지로 간신히 어둠을 밀어내며 빚더미처럼 쌓인 겨울산을 넘는다. 이고 지고 빈손 사십 한평생 울다 간 울 엄니 해 다 진 겨울 저녁 뒤돌아보며, 뒤돌아보며 빈 겨울산을 홀로 넘는다. 좋은 시 느낌하나 2023.02.08
낮달 /문인수 낮달 문인수 왜 그리 내 저무는 때에만 오시는지 또 비켜 나시는지요 어머니, 당신의 인생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저 바람 찬 가지 끝 먼 산마루 여러 길 위에 근심의 힘으로 뜬 흰 낯빛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자꾸 멀리 잊습니다 좋은 시 느낌하나 2023.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