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710

겨울 산에서 /이해인

겨울 산에서 이해인 추억의 껍질 흩어진 겨울 산길에 촘촘히 들어앉은 은빛 바람이 피리 불고 있었네 새 소리 묻은 솔잎 향기 사이로 수없이 듣고 싶은 그대의 음성 얼굴은 아직 보이지 않았네 시린 두 손으로 햇볕을 끌어내려 새 봄의 속옷을 짜는 겨울의 지혜 찢어진 裸木(나목)의 가슴 한켠을 살짝 엿보다 무심코 잃어버린 오래 전의 나를 찾았네

겨울산을 오르며 /김주안

겨울산을 오르며 김주안 눈이 내린 산길을 오른다 아직도 붉은 언어로 남아 있는 팥배나무 벼랑에 서서 가을을 채우던 다람쥐들 엄숙하던 삶들이 때때로 눈속에 갇혀있다 제대로 꼭대기까지 오른 적이 없는 산 오르다 힘들면 바위에 마음을 널어놓고 내가 걸어 온 길의 끝을 생각하며 흰눈을 누더기로 걸친 겨울나무의 삶과 숲을 따라 발자국을 남긴 새들을 궁금해 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랑 겨울 숲을 따라 간 것은 아닐까 저 산모퉁이 돌면 보이지 않는 시간 찾아 갈 수 있을까 바람이 가는 길 물을 수 있을까 오를 수록 깊어지는 산길 질퍽거리는 발자국소리 너에게로 가는 길은 아직도 숨이 차다

겨울 산 /엄영란

겨울 산 엄영란 숲을 따라 올라갑니다. 나뭇잎 흔들리던 소리가 나무 아래 쉬고 있습니다. 새가 앉았던 자리를 안고 나무는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집을 버린 새들의 집이 텅 비어 있습니다. 허공을 맴돌던 새 한 마리가 허공 속으로 날아갑니다. 발아래 흙들이 스멀거리고 마른 풀잎이 수런거립니다. 바람이 붑니다. 산허리를 감고 문득 길이 꺾어집니다. 그 너머의 나무가 눈을 벗어납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더듬어 가는 나의 밑바닥부터 숨이 차 오릅니다. 흐르는 물에 목을 축입니다. 가시가 무디어지지 않은 망개 넝쿨이 나무와 나무를 얼기설기 감고는 물기가 빠져나간 몸을 버티고 있습니다. 비탈길에서는 몸이 기우뚱거립니다. 썩지 못한 낙엽이 제멋대로 뒹굴다 멈추어 섭니다. 내 안에서 썩다 남은 것들이 소리를 ..

겨울산 /조재훈

겨울산 조재훈 ​ 날은 저물고 이름 모를 어린 새 한 마리 겨울산을 넘는다. ​ 가파른 벼랑 쉬지도 못하고 꺼이꺼이 울며 장군처럼 버티고 선 겨울산을 넘는다. ​ 집집마다 꽁꽁 문은 잠기고 대추나무 끝에 찢겨져 연이 울 뿐. ​ 어깻죽지로 간신히 어둠을 밀어내며 빚더미처럼 쌓인 겨울산을 넘는다. ​ 이고 지고 빈손 사십 한평생 울다 간 울 엄니 해 다 진 겨울 저녁 뒤돌아보며, 뒤돌아보며 빈 겨울산을 홀로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