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710

부활ㅡ 4월에/김용택

부활ㅡ 4월에 김용택 피 묻어 선연한 새벽 낯빛들 찢긴 가슴 펄럭여 그리운 그 얼굴들 그리워 밤이면 밤마다 잠 못 이루고 날이면 날마다 걷던 걸음 우뚝우뚝 멈춰서는 소쩍새 길길이 울어 넘는 삼사오월 거 고갯길 펄펄 죽은 몸 펄펄 살아 잡는 손 풀뿌리 뿌리치며 한 많은 고개 산, 산 넘고 물, 물건너 훌훌 단숨에 타는 가슴 불길로 오라 못견디게 그리운 새벽 낯빛 그 고운 얼굴들

추운 봄날 / 황인숙

추운 봄날 황인숙 요번 추위만 끝나면 이 찌무룩한 털스웨터를 벗어던져야지 쾌쾌한 담요도 내다 빨고 털이불도 걷어치워야지. 머리를 멍하게 하고 눈을 짓무르게 하는 난로야 너도 끝장이다! 창고 속에 던져넣어야지. (내일 당장 빙하기가 온다 해도) 요번 추위만 끝나면 창문을 떼어놓고 살 테다. 햇빛과 함께 말벌이 윙윙거리며 날아들 테지 형광등 위의 먼지를 킁킁거리며 집터를 감정할 테지. 나는 발돋움을 해서 신문지를 말아쥐고 휘저을 것이다. 방으로 날아드는 벌은 아는 이의 영혼이라지만. (정말일까?) 아, 이 어이없는, 지긋지긋한 머리를 세게 하는, 숨이 막히는 가슴이 쩍쩍 갈라지게 하는 이 추위만 끝나면 퍼머 골마다 지끈거리는 뒤엉킨 머리칼을 쳐내야지. 나는 무거운 구두를 벗고 꽃나무 아래를 온종일 걸을 테다..

봄을 캐는 사람들 / 정해철

봄을 캐는 사람들 정해철 유난스리 변덕스런 날씨 탓에 새순대신 눈꽃이 피고 거리에는 아직 종종 걸음 치는 봄이 잠을 잔다. 실개천 둑방 옆 말라버린 잔디 사이로 게으런 봄이 지난겨울 파종해 두었던 쑥이며 냉이며 달래를 흩뿌리고 지나간다. 삼삼오오 머리엔 수건으로 챙을 만들고 한손엔 소쿠리를 다른 손엔 칼을 잡고 더디 오는 봄이 아쉬운 듯 몇 시간째 허리 한번 펴지 않고 봄을 캐는 사람들...

봄날은 간다 / 이향아

봄날은 간다 / 이향아 누가 맨 처음 했던가 몰라 너무 흔해서 싱겁기 짝이 없는 말 인생은 짧은 여름밤의 꿈이라고 짧은 여름 밤의 꿈같은 인생 불꽃처럼 살고 싶어 바장이던 날 누가 다시 흔들어 깨웠는지 몰라 강물은 바다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 실개천 흘러서 바라로 가는 길 엎드려 흐느끼는 나의 종교여, 나를 아직도 용서할 수 있는지. 꽃이 지는 봄, 땅 위에 물구나무 서서 영원의 바다 같은 하늘을 질러 나 이제 길을 떠나도 돌아올 수 있는지, 봄날은 간다. 탈없이 간다.

무제치늪의 봄 / 정일근

무제치늪의 봄 정일근 마음을 얻어야 손이 순응하는 법이다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을 위해 봄은 오고 바라볼 줄 아는 손을 위해 꽃은 핀다 물이 만든 물의 나라 무제치(舞祭峙)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도 물이니 물은 다투지 않고 평등하게 스며들고 겸허하여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꽃을 기다려 삼월 봄이 오고 봄을 기다려 사월 꽃이 피는 그 착한 물들이 빚어내는 빛나는 봄 오랜 마음의 친구가 내미는 손처럼 그 따뜻한 손 꽉 잡아보고 싶은 무제치늪의 봄

봄의 메시지 / 유자효

봄의 메시지 유자효 설레고 싶다 달뜨고 싶다 신경을 올올이 곤두세우고 싶다 이국의 나무 냄새 같은 것 이방의 언어 같은 것 바다의 바람을 돛폭 가득히 안은 범선의 출항 같은 것 낯선 것은 언제나 신선하고 여행을 생각할 때마다 영혼은 때를 벗는다 모험을 도전하는 젊음에 의해 역사는 절망을 이겨 왔었고 세계는 생명의 자양을 얻었다 서투르고 싶다 어리고 싶다 순수를 제대로 볼 수 있을 때 금강석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싶다 꿈꾸고 싶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눈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좀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나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봄 기도 / 강우식

봄 기도 강우식 하찮은 풀잎이라도 새싹들은 지뢰 밟듯 조심스럽다 담장 포도나무들은 차 스푼보다 작은 송이 송이 속에 좁쌀알만한 꿈들을 달고 바람 속에, 햇볕 속에 녹아 있고 사과나무는 하얗게 꽃 피어 벌들의 날개 짓에도 얼굴 붉혀라. 꿈 속에 꿈꾸던 내 사람아 이제는 혼수의, 인사불성의 긴 잠에서 죽이는 꽃들의 빛깔로, 향기로, 하늘거림으로 아픈 데서부터 깨어나 한 치 밖에 있는 봄 구경을 제발 좀 하여라. 단 하루만이라도 봄빛으로 눈 떠 보아라. 하늘빛이 시리도록 맑고 흰 눈동자를...... 펑, 펑, 펑 꽃 터지듯 떠 보아라

꿈같이 오실 봄 / 오광수

꿈같이 오실 봄 오광수 그대! 꿈으로 오시렵니까? 백마가 끄는 노란 마차 타고 파란 하늘 저편에서 나풀 나풀 날아오듯 오시렵니까? 아지랑이 춤사위에 모두가 한껏 흥이 나면 이산 저 산 진달래꽃 발그스레한 볼 쓰다듬으며 그렇게 오시렵니까? 아! 지금 어렴풋이 들리는 저 분주함은 그대가 오실 저 길이 땅이 열리고 바람의 색깔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어서 오세요. 하얀 계절의 순백함을 배워 지금 내 손에 쥐고 있는 메마름을 버리고 촉촉이 젖은 가슴으로 그대를 맞이합니다. 그대! 오늘밤 꿈같이 오시렵니까?

청매화, 봄빛 / 이은봉

청매화, 봄빛 이은봉 청매화 푸르른 꽃잎들, 밭두둑마다 푸시시 웃으며 뛰놀고 있다 킁킁킁, 꽃향기 벌떼처럼 코끝 싸하게 쏘아대는 마을......, 강언덕 저쪽 산비탈에선 일찍 핀 꽃잎들, 아랫도리를 꼬으며 이울고 있다 잠시 밭두둑에 서서, 옷매무새 고치며 슬픔 견디고 있는 여인......, 살며시 꺼내든 손거울 속으로, 또 하루치의 봄빛, 멈칫멈칫 스며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