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고 있다
남궁명
1.
밤마다 풀벌레 울음이 조금씩 가을을 잡아 당기고 그만큼 커피향이
깊어졌다 안경알이 맑아진 건 가을 때문이다 연필심이 사각거리며
맑아진 가을을 읽다가 밑줄을 긋는다 내 그림자는 밑줄 그어진 가을
속으로 점점 깊어지고 터엉텅, 밤은 크고 둥그런 항아리 속이다
2.
블라인드에 드리운 바람이 살랑거리며 가을의 말을 쏟아낸다 드맑고
파아란 하늘냄새가 방 안 가득 흩어진다 프린터에서 풀대궁의 서걱임이
흘러나온다 꽃향기의 모음과 사색의 자음을 투명하게 기르는 가을, 나
는 이제 하늘냄새를 녹슬지 않게 오래 고독을 가둘 것이다
3.
창 밖 먼 기적소리 들려온다 지구 저 켠의 그대가 손 흔들어 보낸 그
리움, 천만 톤의 고요를 흐르는 어둠 속 별빛이 쏟아진다 나는 별빛을
책갈피에 끼우고 밖으로 나선다 날마다 세상 밖으로 등져 날랐던 미완의
말들, 움트고 있을까 초록의 경계를 한껏 부풀려 온 나무가 고개를 묻고
닿을 수 없는 아득함을 출렁인다 달이 도르래 우물 깊이 잠겼던 가을을
조심 조심 두레박에 퍼올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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