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688

새해 두어 마디 말씀 /고은

새해 두어 마디 말씀 고은 새해 왔다고 지난날보다 껑충껑충 뛰어 端午날 열일곱짜리 풋가슴 널뛰기로 하루 아침에 찬란한 세상에 닿기야 하리오? 새해도 여느 여느 새해인지라 궂은 일 못된 일 거푸 있을 터이고 때로 그런 것들을 칼로 베이듯 잘라버리는 해와 같은 웃음소리 있을 터이니 우리 아낙네들이시여 쥔 양반과 다툴 때 조금만 다투고 사랑도 그냥 사랑이 아니라 눈을 부릅떠서 지지리 못난 사내 짓 고쳐 주시압 에끼 못난 것! 철썩 불기라도 때리시압 그 뿐 아니라 우리 아낙네들이시여 우리 집만 문 잠그고 으리으리 살 게 아니라 더러는 지나가는 이나 이웃이나 잘 안되는 듯하면 뭐 크게 떠벌릴 건 없고 그냥 수숫대 수수하게 도우며 살 일이야요 안 그래요? 우리 아낙네들이시여 예로부터 변하는 것 많아도 그 가운데 안..

새아침에 / 조지훈

새아침에 조지훈 모든 것이 뒤바뀌어 秩序를 잃을지라도 星辰의 運行만은 변하지 않는 法度를 지니나니 또 삼백예순날이 다 가고 사람 사는 땅 위에 새해 새아침이 열려오누나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이 永劫의 둘레를 뉘라서 짐짓 한 토막 짤라 새해 첫날이라 이름지었던가 뜻두고 이루지 못하는 恨은 太初 以來로 있었나부다 다시 한 번 意慾을 불태워 스스로를 채찍질하라고 그 不退轉의 決意를 위하여 새아침은 오는가 낡은 것과 새것을 義와 不義를 삶과 죽음을ㅡ 그것만을 생각하다가 또 삼백예순날은 가리라 굽이치는 山脈 위에 보라빛 하늘이 열리듯이 출렁이는 波濤 위에 이글이글 太陽이 솟듯이 그렇게 열리라 또 그렇게 솟으라 꿈이여! *

희망가 / 문병란​

희망가 문병란​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맛 향기를 지닌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길 멈추지 말라​. 인생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한 고비 지나면 구름뒤 태양은 다시 뜨고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1월 / 오세영

1월 오세영 1월이 색깔이라면 아마도 흰색일 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신(神)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 꿈꾸는 짐승 같은 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 1월이 음악이라면 속삭이는 저음일 게다. 아직 트이지 않은 신(神)의 발성법(發聲法). 가지 끝에서 풀잎 끝에서 내 영혼의 현(絃) 끝에서 바람은 설레고, 1월이 말씀이라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육성일 게다. 유년의 꿈길에서 문득 들려오는 그녀의 질책, 아가, 일어나거라, 벌써 해가 떴단다. 아, 1월은 침묵으로 맞이하는 눈부신 함성.

1월 / 최명진

1월 최명진 모처럼 함박눈이 내렸다 아래층 노점천막이 무너지지 않을 만큼 길을 지나간 구두 굽들의 높이만큼 쓸린 눈 무더기가 외눈가로등 밑에 수북이 쌓였다 창밖은 내내 시시하고 늦게 잦아든 겨울 속으로 꽃처럼 성에가 핀다 더딘 구름 속 찬 햇살이 얼핏 고개를 민다 새벽일을 마치고 온 엄마는 늦은 잠을 잔다 산토끼처럼 발자국처럼 듬성듬성 길은 조용하다 이 도시에서 자란 옆집아이처럼 긴 겨울이 시작됐다 1월의 달력은 두껍고 아직 눈을 털지 못한 녹슨 그네가 빈 놀이터에 나란히 매달려있다

1월의 시 / 이해인

1월의 시 이해인 첫 눈 위에 첫 그리움으로 내가 써보는 네 이름 맑고 순한 눈빛의 새한 마리 나뭇가지에서 기침하며 나를 내려다본다 자꾸 쌓이는 눈 속에 네 이름은 고이 묻히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무수히 피어나는 눈꽃 속에 나 혼자 감당 못할 한방울의 피와 같은 아픔도 눈밭에 다 쏟아 놓고 가라 부디 고운 저분홍 가슴의 새는 자꾸 나를 재촉하고……

1월 / 이외수

1월 이외수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위에 내가 서있다 이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한밤중에 바람은 날개를 푸득거리며 몸부림치고 절망의 수풀들 무성하게 자라 오르는 망명지 아무리 아픈 진실도 아직은 꽃이 되지않는다. 내가 기다리는 해빙기는 어디쯤에 있을까 얼음 밑으로 소리죽여 흐르는 불면의 가움 기다리는 마음 간절할수록 시간은 날카로운 파편으로 추억을 살해한다. 모래바람 서걱거리는 황무지 얼마나 더 걸어야 내가심은 감성의 낱말들 해맑은 풀꽃으로 피어날까 오랜 폭설 끝에 하늘은 이마를 드러내고 나무들 결빙된 햇빛의 미립자를 털어 내며 일어선다. 백색의 풍경 속으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눈부시다.

1월 / 용혜원

1월 용혜원 1월은 가장 깨끗하게 찾아온다 새로운 시작으로 꿈이 생기고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다 올해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기대감이 많아진다 올해는 흐르는 강물처럼 살고 싶다 올해는 태양처럼 열정적으로 살고 싶다 올해는 먹구름이 몰려와 비도 종종 내리지만 햇살이 가득한 날들이 많을 것이다 올해는 일한 기쁨이 수북하게 쌓이고 사랑이란 별 하나 가슴에 떨어졌으면 좋겠다

1월에 쓰는 엽서 / 신현복

1월에 쓰는 엽서 신현복 우리, 1월이 있음을 감사하자 어제까지의 시간을 용서 받고 삶에 새벽 같은 1월이 있음을 감사하자 마음속에 작은 항아리를 들여놓고 사랑을 숙성시키자, 1월에는 묵은 신문의 슬픈 기사에도 눈길이 필요한 늘 배고픈 우리들 사랑이지 않나 그 먼 별도 그 작은 초승달도 가슴 따뜻하게 해주는 약 숟가락 크기의 빛으로 사랑 받지 않나 마른 들풀에게는 봄을 기다릴 수 있는 힘이 되어 주고 가난한 마음에는 행복의 싹을 잃지 않게 하는 작지만 큰사랑의 빛 우리 1년 동안 베풀 그 빛을 숙성시키자, 1월에는 슬픔은 기쁨으로 미움은 용서로 불행은 행복과 찬란한 희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