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688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그대 앞에 봄이 있다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2월 /이기철

2월 /이기철 2월은 어라연이나 구절리쯤에 놀다가 미루나무 가지가 건드리는 기척에 놀라 횡계 묵호를 거쳐 산청 함양 거창을 지나온 듯합니다 무릎 어딘가에 놋대접을 올려놓고 고방에서 자꾸 방아깨비 여치 날개 소리를 꺼내 담습니다 그냥 놔둬도 저 혼자 놀며 안 아플 햇빛을 억새 지릅으로 톡톡 건드려보는 2월 아침이 또 마당가에 와 엽서처럼 조그맣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예순 해를 산 우리 집 마당이 난생 처음 와본 서양나라의 제과점 앞뜰 마냥 서투러져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자꾸 살핍니다 나도 이 땅에 와서 아이 둘 낳고 빛 좋은 남향집 하날 얻기도 했지만 세상 속으로 아이들은 헤엄쳐 나가고 나 혼자 맞는 아침은 처음 오는 햇살처럼 추웁습니다 새 뱃속으로 들어간 씨앗들도 꼼지락거리며 새똥으로 나와 다시 움틀..

2월 /이남일

2월 /이남일 하얀 2월은 기다리는 달 힘내세요. 따뜻한 3월이 오고 있어요. 입춘이 지나간 강가에 서면 얼음장 밑에서 몸 푸는 소리 들리지 않나요. 부스럭거리는 덤불 속에서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이제 봄과 나 사이에는 화선지 위에 꽃잎 하나 찍은 듯 기쁨으로 가득 차겠지요. 힘이 들면 위를 보지 말고 아래를 보세요. 내일은 봄이 좀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2월의 노래 /목필균

2월의 노래 목필균 잊혀진 이별이 어디 있으랴 내가 너였어도 네가 나였어도 꿈길 만이 길이라 동백꽃 흥건하게 내려앉는데 입춘 대문 활짝 열면 큰 호흡으로 들어서는 햇살로 겨우내 동여 맨 옷고름 풀어내면 지천으로 피어날 꽃들 홍매화 피어나고 눈 비비면 일어설 산수유도 네 숨결로 노래하는데 어찌 내가 네게로 가지 않을까 먼 길 거슬러 올라가며

2월 /임영조

2월 임영조 온 몸이 쑤신다. 신열이 돌고 갈증이 나고 잔기침 터질듯 목이 가렵다. 춥고 긴 엄동(嚴冬)을 지나 햇빛 반가운 봄으로 가는 해빙의 관절마다 나른한 통증 그 지독한 몸살처럼 2월은 온다, 이제 무거운 내복은 벗어도 될까 곤한 잠을 노크하는 빗소리 창문을 열까 말까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2월은 왔다 간다. 늘 키 작고 조용해서 간혹 잊기 쉬운 女子처럼....

이월 /나병춘

이월 나병춘 이월은 홀로 걷는 달 인디언 수우족의 달력이다 홀로 걸어가는 뒷모습 터벅 터벅 터벅...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인생은 잠깐이라는데 할 일도 많을 텐데 오직 홀로 걸어간다는 것 홀로 걷다 보면 만나게 되리라 구름도 나무도 이정표도 그리운 그대도 만나게 되리 새들도 만나고 꽃도 만나고 인생은 마냥 걸어가는 것 구름 따라 바람 따라 걷다보면 아름다운 것들과 하나가 되리 강도 만나고 산도 만나고 그러다 보면 절로 산이 되고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리 어느 순간이면 당도하리라 꿈꾸던 바닷가 어느 기슭에 한 마리 깃푸른 눈망울 새벽을 기다리는 한 마리 가릉빈가 새가 되어서

이월의 우포늪 /박재희

이월의 우포늪 박재희 우포늪은 보이는 것만의 늪이 아니다 어둠 저 밑바닥 시간의 지층을 거슬러 내려가면 중생대 공룡의 고향이 있다 원시의 활활 타오르던 박동이 시린 발끝에 닿기까지 일억 사천 만년 무수한 공룡발자국이 쿵쿵 가슴으로 밀쳐 들어온다 억겁을 버틴 가슴 벅찬 것들 나는 어느 백악기의 밀림을 걷고 있는 것일까 화석 속에 갇혔던 공룡이 어둠의 사슬을 풀면 왕버들 숲 어디쯤 나도 먼 중생대를 꿈꾸는 한 마리 공룡일까 감았던 눈을 뜨며 한 순간 전율했던 백악기를 빠져 나오자 물 속에 녹은 풀의 뼈마디와 각시붕어의 비린 향기가 물살 간질이며 깨어나고 있었다 늪, 어딘가에 있을 세월의 우체국 그 우체국에 부칠 사연을 이월의 찬 바람이 쓰고 있는가 오랜 역사의 능선에 한점 불 밝히는 빙하기에 잠긴 공룡발자국..

2월의 칠곡 /홍문숙

2월의 칠곡 홍문숙 얼음들은 이곳으로 몰려와 평면의 날들을 보내고 있다 제 안 한켠에 겨울 철새들 몇 담아놓고서 침묵의 날들을 모아 들인다 얼지 못하는 것은 어떠한 계절도 빠질 수 없다는 각오, 봉합하지 못한 미세한 입자의 경계를 허물기라도 하듯 한낮의 태양이 기웃거리는 동안에도 빙하기의 날짜들 저수지 밖 4월의 꽃들을 줄다리기 한다 꽃들의 전쟁이 결빙과 해빙 사이 미세한 경계 속으로 몰려드는 오후2시, 2월의 저수지는 꽃내음들의 국경지대다 화석이 된 계절들의 간이역이다 낯면을 숨기며 들른 초면의 향기들이 빙하기의 유물들처럼 서로의 행방을 얼음과 물이 되어 수소문 하느라 다투거나 부동의 대립 속에서 물오리 몇 마리 받아내며 둑이 있는 저 아래서부터 새로운 계절이 유입되고 또 한켠 물들은 시간의 둑들을 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