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687

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서/박목월

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서 박목월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결에는 싱그러운 미나리 냄새가 풍긴다. 해외로 나간 친구의 체온이 느껴진다. 참으로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골목길에는 손만 대면 모든 사업이 다 이루어질 것만 같다. 동·서·남·북으로 틔어 있는 골목마다 수국색(水菊色) 공기가 술렁거리고 뜻하지 않게 반가운 친구를 다음 골목에서 만날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약간 걸음걸이가 빨라지는 어제 오늘. 어디서나 분홍빛 발을 아장거리며 내 앞을 걸어가는 비둘기를 만나게 된다. ㅡ무슨 일을 하고 싶다. ㅡ엄청나고도 착한 일을 하고 싶다. ㅡ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 속에는 끊임없이 종소리가 울려오고 나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난다. 희고도 큼직한 날개가 양 겨드랑..

3월의 시/ 윌리엄 워즈워드

3월의 시 윌리엄 워즈워드 수탉은 꼬기오 시냇물은 졸졸 작은 새들은 짹짹 호수는 번쩍번쩍 푸른 들판은 햇볕에 졸고 늙은이와 어린 아이 힘센 자와 같이 일을 하네 소들은 풀을 뜯으며 고개 한 번 쳐들지 않네 마흔 마리가 한 마리같이! 패한 군사들처럼 흰 눈은 물러가고 헐벗은 언덕 위에서 쩔쩔매네 소년농부ㅡ 이따금 ㅡ 환호성을 울리고 산에는 기쁨이 샘물에는 숨결이 조각구름은 떠가고 푸른 하늘은 끝도 없어라 비는 그치고 간 데 없네!

'3월' / 장석주

'3월' 장석주 ​ 얼음을 깨고 나아가는 쇄빙선같이 치욕보다 더 생생한 슬픔이 내게로 온다 ​ 슬픔이 없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모자가 얹어지지 않은 머리처럼 그것은 인생이 천진스럽지 못하다는 징표 ​ 영양분 가득한 저 3월의 햇빛에서는 왜 비릿한 젖 냄새가 나는가 ​ 산수유나무는 햇빛을 정신없이 빨아들이고 검은 가지마다 온통 애기 젖꼭지만한 노란 꽃눈을 틔운다 ​ 3월의 햇빛 속에서 누군가 뼈만 앙상한 제 다리의 깊어진 궤양을 바라보며 살아봐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 3월에 슬퍼할 겨를조차 없는 이들은 부끄러워하자 그 부끄러움을 뭉쳐 제 슬픔 하나라도 빚어낼 일이다 ​ ​- 장석주,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세계사, 2001) ​

'3월 2일' / 김용택

'3월 2일' 김용택 ​ 올해도 새 얼굴들이 내 앞에 앉아 있습니다. 2학년이구요 세 명입니다. ​ 나를 바라보는 저 새까만 눈망울들, 세 세상이지요. ​ 나는 그냥 이렇게 살래요. 살 만해요. 그래도, 이렇게 오래 살았잖아요. ​ 그냥 살래요. 저 아이들이 나더러 지들이랑 그러재요. 그래서 그럴래요 그냥. ​ - 김용택,『수양버들』(창비, 2009) ​

'3월, 입맞춤' / 이민숙

'3월, 입맞춤' 이민숙 ​ 뜨거운 입맞춤 육체 심드렁한 중년 너머의 우리 부부 까마득하다 얼음새꽃, 변산바람꽃, 동백의 붉은 잎, 사물사물 피어오는데 늙음을 탓하면 무엇해 어젯밤 그짓을 탐하고 말았다 침대 위에 서로 누운 그가 아니라 젊은 청년을 불러서였다 중학시절 내 영어선생님 미스터 딕슨! 짖궂은 청춘들 때문에 꽤나 얼굴 붉히던, 꿈속 연인 황홀 깊어 샘물 같은 입맞춤 오늘 아침밥도 그처럼 살짝 타버렸다 온세상은 날아가고 코끝이 고소하다 ​ 내 청청한 불륜, 너의 탓 아니다 봄! ​ ​- 이민숙, 『동그라미, 기어이 동그랗다』(도서출판 애지, 2015) ​ ​

'3월에서 4월 사이' / 안도현

'3월에서 4월 사이' 안도현 ​ 산서고등학교 관사 앞에 매화꽃 핀 다음에는 산서주조장 돌담에 기대어 산수유꽃 피고 산서중학교 뒷산에 조팝나무꽃 핀 다음에는 산서우체국 뒤뜰에서는 목련꽃 피고 산서초등학교 울타리 너머 개나리꽃 핀 다음에는 산서정류소 가는 길가에 자주제비꽃 피고 ​ - 안도현, 『그리운 여우』(창작과비평사, 1997)

'삼월 중순께' / 이향아

'삼월 중순께' 이향아 ​ 3월 중순께 호남 고속도로 전주 근처 기웃거리며 지나가고 있을 때 옆구리 터진 길로 접어들면 군산으로 갈 수도 있지만 그냥 스쳐 지나가고 있을 때 아무리 무심한 사람이라도 보았을 거다. 벙싯벙싯 참지 못하는 복숭아 나무 연두색 머리칼 풀어젖힌 몽롱한 버들 언제 저렇게까지 되었는지 몰라 이래서 사람들이 미치기도 하나 봐 틀림없는 3월 중순 호남 고속도로 바쁠 것 없다, 숨도 쉬며 가자. 가슴 눌러 타이르며 지나가노라면 이런 세상 그냥 두곤 갈 수 없다는, 나는 아무래도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 ​ - 이향아, 『오래된 슬픔 하나』(시와시학사, 2001) ​

'삼월' / 이기철

'삼월' 이기철 ​ 밖에서 누군가가 쫑알거려 나가보니 입학식에 온 1학년 같은 개나리 피는 소리였습니다 여기는 시메산골 버스도 우체부도 발자국 예쁜 사람도 조금씩은 늦게 옵니다 슬리퍼를 운동화로 갈아 신는 동안 몇 송이가 더 피어 제 얘길 들어 달라고 입술을 쫑긋거리고 있습니다 햇살이 몰고 오는 노란 말들을 낱낱 귀에 담습니다 저쪽 솔 그늘에는 진달래가 저도 늦지 않으려고 얼굴이 붉어져 있고 응달에서 뛰어나오려는 자두꽃이 흰 봉투를 막 뜯고 있습니다 한 스무날은 이래저래 집 안이 소란할 것입니다 삼월은 자식 많은 어머니같이 손 쉴 틈이 없습니다 ​ - 이기철, 『흰 꽃 만지는 시간』(민음사, 2017) ​

'삼월' / 고영

'삼월' 고영 ​ 조용한 간이역에 개나리꽃이 무더기로 피었다 ​ 기차보다 은밀한 창을 달고 기차보다 먼저 기적을 울리고 기차보다 먼저 흔들리고 기차보다 먼저 괴로워하고 기차보다 공격적인, 기차보다 다분히 혁명적인, ​ 개나리꽃들이 간이역 철길 위에 급진적으로 피어 있다 ​ 개나리꽃들이 연좌농성 중인 봄날 급진적인 삼월! ​ - 고영,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천년의시작, 2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