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690

12월의 시 / 이해인

12월의 시 이해인 또 한 해가 가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 하기보다는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 주십시오. 한 해 동안 받은 우정과 사랑의 선물들 저를 힘들게 했던 슬픔까지도 선한 마음으로 봉헌하며 솔방울 그려진 감사카드 한 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띄우고 싶은 12월 이제 또 살아야지요 해야 할 일들 곧잘 미루고 작은 약속을 소홀히 하며 나에게 마음 닫아 걸었던 한 해의 잘못을 뉘우치며 겸손히 길을 가야 합니다.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제가 올해도 밉지만 후회는 깊이 하지 않으렵니다. 진정 오늘밖에 없는 것처럼 시간을 아껴 쓰고 모든 이를 용서하면 그것 자체가 행복할 텐데 이런 행복까지도 미루고 사는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할 것 너무 많아 멀미 나는 세상에서..

그리운 편지 /이응준

그리운 편지 이응준 그 도시에서 11월은 정말 힘들었네 그대는 한없이 먼 피안으로 가라앉았고 나는 잊혀지는 그대 얼굴에 날 부비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가에 대하여 덧없이 많은 날들을 기다렸지만 무엇이 우리 주위에서 부쩍부쩍 자라나 안개보다도 높게 사방을 덮어가는가를 끝내 알 수는 없었네 11월이 너무 견디기 어려웠던 그 도시에서 그대가 가지고 있던 백 가지 슬픔 중에 아흔아홉으로 노래 지어 부르던 못 견디게 그리운 나는

늦어도 11월에는/ 김행숙

늦어도 11월에는 김행숙 느릿느릿 잠자리 날고 오후의 볕이 반짝 드는 골목길 가을 냄새가 시작된다 시들어가는 시간 사람들이 종종걸음 치는 저녁 때면 어김없이 등줄기가 시리다 갑자기 햇살이 엷어지고 나뭇잎 하나 툭! 떨어져 내리면 나도 옷깃을 여며야 한다 내일을 기약하는 마른 풀잎처럼 다시 마음을 다잡으리라 늦어도 11월에는.

11월이 가는 갈밭 길에서/김동규

11월이 가는 갈밭 길에서 김동규 처음에는 문득, 바람인 줄 알았다 娼婦의 賣笑같은 까칠한 소리로 살과 살을 비벼대다 드러눕던 몸짓, 바람 가는 길목을 지키고 섰다가 혼절하는 몸소리로 제 허리를 꺾어 속 대를 쥐어 틀어 물기를 말리고 타오르는 들불의 꿈을 꾸며 잠이 든 늙은 갈대의 가쁜 숨소리 11월이 가는 갈밭 길에는, 빠른 걸음으로 노을이 오고 석양마다 숨이 멎던, 하루를 또 보듬으며 목 젖까지 속울음 차오르던 소리를 처음에는 문득, 바람인 줄 알았다

11월을 빠져나가며/ 정진규

11월을 빠져나가며 정진규 흙담장에 걸린 먼지투성이 마른 씨래기 다발들 남루한 내 사랑들이 버석거린다 아직도 이파리들 땅에 내려놓지 못할 몇 그루 은행나무들이 이해되지 않으며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다른 이들의 철 지난 사랑이 이해되지 않는다 혼자서 돌아오는 밤거리 골목길에 버려진 고양이들이 날로 늘어나고 나는 자꾸 올라가고 있는데 계단들은 그만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며 비어지고 있다 빈 계단들이 허공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이제 너에게로 돌아가는 길은 위기로만 남아 있구나 골목길 들어서면 겨우 익숙한 저녁 냄새만 인색하게 나를 달랜다 이 또한 전 같지 않다 12월 때문에 11월은 가장 서둔다 끝나기 전에 끝내야 할 일들이 한꺼번에 들통나고 있다 야적까지 하고 있는 빈터, 그빈터에서도 우리도 서둘러 끝내자..

11월의 시 /이임영

11월의 시 이임영 어디선가 도사리고 있던 황량한 가을 바람이 몰아치며 모든 걸 다 거두어가는 11월에는 외롭지 않은 사람도 괜히 마음이 스산해지는 계절입니다 11월엔 누구도 절망감에 몸을 떨지 않게 해 주십시오. 가을 들녘이 황량해도 단지 가을걷이를 끝내고 따뜻한 보금자리로 돌아가서 수확물이 그득한 곳간을 단속하는 풍요로운 농부의 마음이게 하여 주십시오 낮엔 낙엽이 쌓이는 길마다 낭만이 가득하고 밤이면 사람들이 사는 창문마다 따뜻한 불이 켜지게 하시고 지난 계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사랑의 대화 속에 평화로움만 넘치게 하여 주소서 유리창을 흔드는 바람이야 머나먼 전설 속 나라에서 불어와 창문을 노크하는 동화인양 알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