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690

11월의 부산 중앙동 거리 /김상미

11월의 부산 중앙동 거리 김상미 11월의 부산 중앙동 거리 나는 언제나 그 거리를 좋아했다 그곳에서 마시던 커피, 쓰디쓴 소주, 꼬들꼬들했던 갈매기살, 바벨탑처럼 높이 솟아 있던 부 산타워…… 때로는 너무 강렬해서 고개를 돌려야 했던 그 거리를 함께 걸었던 희망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꽃다발들은 이미 시들고 11월의 찬바람은 회오리를 일으키며 그 시든 꽃다발들을 꽃다발들의 파편까지도 모두 휩쓸어가 버렸지만 용두산 40계단을 오르며 보았던 어디로 가는지 모를 비행기 한 대 내가 상상한 꿈의 모습으로 높이 날아오르던 비행기 한 대 그 생생한 질주 아래 보름달처럼 꽉 차 있던 내 시선을 아직도 나는 잊지 못하고 있다 부산우체국 전화 부스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던 누군가의 우애와 경쾌한 중앙성당의 아침 종소리..

11월에는 /이희숙

11월에는 이희숙 붉은 가을이 그대 웃음에 걸려 서성이는 동안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을 영접하고 떨어짐마저 기쁘게 허락하는 나무의 삶을 배우자 찬란한 가을이 그대 이마에 앉아 꿈꾸는 동안에는 겸손한 마음으로 밤을 배웅하고 인디언처럼 춤추고 노래하자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빠른 때라는 걸 미처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아직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달 11월에는 꿈을 노래하고 희망을 이야기하자

11월의 단상 /한경희

11월의 단상 한경희 버들무지 냇가엔 차가운 물결이 있다 맑갛게 입술을 다문 하얀 돌 찰랑찰랑 외로움을 엮는다 향기로운 꽃잎이 바람에 불려가다 빨간 색깔 하나 툭 떨구어준다 조금은 퇴색한 가을의 소리 그 황량한 목덜미에 노을이 길게 주저 앉는다 11월은 맑은 영혼이 깃드는 달 탱글거리는 하늘가 눈물은 새뜻한 이별의 멜로디 은은한 가곡 한 곡 어떠세요? 부르는 이는, 허전한 잎새의 모난 조각들 고요히 귀담아 들어주는 이는, 바람 따라 술렁이는 으슬한 여운 표표히 멀어지는 가을 발자국

11월의 나팔꽃/김점희

11월의 나팔꽃 김점희 뉘라서 알 까 베란다 한 켠 여름내 내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쓸모없는 화분이 피워낸 진보라 나팔꽃을 뉘라서 알 까 입동 지나 첫 눈 내린 늦은 11월 임 맞는 시악시 수줍음으로 찬바람이 비워낸 빈 가슴에 진보랏빛 유혹으로 다가온 것을 아픔이어라 가느다란 생명줄 따라 솟아난 잎의 겨드랑이마다 기어이 고통의 나래편 야들한 꽃송이 아쉽다 기댈 곳 없어 뻗지 못한 줄기 되돌아와 제 몸 감고 뒤틀어진 외로움으로 피워낸 눈물꽃이여 빛나라, 11월의 햇살이여 깊게 파인 통꽃 설움의 눈물샘 말려 버리게...

아무것도 없는, 그래서 11월 /김옥경

아무것도 없는, 그래서 11월 김옥경 계절이 다시 내린다 세탁소에 걸린 묵은 옷으로 지난겨울 먹다 버린 사랑이 서리로 차갑게 나를 적시며 낙엽도 눈도 비도 없는 빈 들녘 바람에 묻혀온 눈물은 돌 틈 사이 씨앗을 몰래 가두고 황급히 사라지는데 밀회를 꿈꾸는 새 한 마리 아무것도 없는, 그래서 버리지 못하는 그대 사랑

11월에서 /복효근

11월에서 복효근 먼 길 가는 적막함을 알았는지 나무들은 벌써 허전한 어깨들 기대고 길 떠나고 있다 골짜기 물은 제 아는 것들의 이름을 외우며 두런두런 길을 챙기고 산 하나가 물위에 제 그림자를 싣는구나 남아있는, 혹은 남아있을 수 있다고 믿는 것들의 귀싸대기 후려치며 바람은 몰려오고 그 때마다 숲은 추억 쪽으로 몇 잎 뿌려주며 어서 가라고 어서 가자고 손 흔들어주고 있다 이윽고 긴 밤이 오리라 나도 어서 손 흔들자

십일월의 데생 /이규봉​

십일월의 데생 이규봉​ 계절이 비스듬히 기울어져있다 마른 수초가 듬성듬성한 마른 연못엔 시월이 동전처럼 가라앉아 있고 십일월이 둥둥 떠 있다 분수는 분수도 모른 채 춤을 추고 비단잉어가 물 위에 떠 있는 십일월의 노란 잎사귀를 물어뜯는다 제 어미의 죽음이 새 어미의 플러그와 아무 접속이 없는데도 비단잉어는 가시 지느러미를 곧추세운다 그녀는 문장 끝 물음표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지평보다 낮은 곳을 향하여 담담히 제 빛깔로 걸어가고 있다 붉은 단풍이 초록 잎에 눈길 주지 않듯이

11월이 가는 갈밭 길에서/ 김동규

11월이 가는 갈밭 길에서 김동규 처음에는 문득, 바람인 줄 알았다 娼婦의 賣笑같은 까칠한 소리로 살과 살을 비벼대다 드러눕던 몸짓, 바람 가는 길목을 지키고 섰다가 혼절하는 몸소리로 제 허리를 꺾어 속 대를 쥐어 틀어 물기를 말리고 타오르는 들불의 꿈을 꾸며 잠이 든 늙은 갈대의 가쁜 숨소리 11월이 가는 갈밭 길에는, 빠른 걸음으로 노을이 오고 석양마다 숨이 멎던, 하루를 또 보듬으며 목 젖까지 속울음 차오르던 소리를 처음에는 문득, 바람인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