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690

시월 이야기/이향지

시월 이야기 이향지 만삭의 달이 소나무 가지에서 내려와 벽돌집 모퉁이를 돌아갑니다 조금만 더 뒤로 젖혀지면 계수나무를 낳을 것 같습니다 계수나무는 이 가난한 달을 엄마 삼기로 하였습니다 무거운 배를 소나무 가지에 내려놓고 모로 누운 달에게 "엄마" 라고 불러봅니다 달의 머리가 발뒤꿈치까지 젖혀지는 순간이 왔습니다 아가야아가야 부르는 소리 골목을 거슬러 오릅니다 벽돌집 모퉁이가 대낮 같습니다

저녁별/이준관

저녁별 이준관 강가에서 물수제비를 뜨다 오는 소년이 저녁별을 쳐다보며 갑니다 빈 배 딸그락거리며 돌아오는 새가 쪼아먹을 들녘에 떨어진 한 알 낱알 같은 저녁별 저녁별을 바라보며 가축의 순한 눈에도 불이 켜집니다 가랑잎처럼 부스럭거리며 눈을 뜨는 풀벌레들을 위해 지상으로 한없이 허리를 구부리는 나무들 들판엔 어둠이 어머니의 밥상보처럼 덮이고 내 손바닥의 거친 핏줄도 풀빛처럼 따스해옵니다 저녁별 돋을 때까지 발에 묻히고 온 흙 이 흙들이 오늘 내 저녁 식량입니다

외로운 풀벌레/박정만

외로운 풀벌레 박정만 까닭없이 눈에 눈물이 돌고 진종일 사랑에 배고프던 철없던 봄날, 나는 그대의 젖동생같이 아아 젖동생같이 울다 말다 울다 말다 잠에 지쳐서 눈물어린 꿈 하나를 꾸었습니다. 정향(丁香)나무 밑이었지요. 이따금 생각처럼 바람이 불고 어디선가 날아온 풀벌레 울음 소리가 내 목청에 금강(金剛)처럼 어렸습니다. 그러자 내 몸의 어디에서도 풀벌레 울음 소리가 금강처럼 새어나기 시작했지요. 하나, 둘, 그것들은 수없이 내리고 쌓여 수천의 풀벌레 울음 소리가 되었었지요. 눈물은 봄꽃보다 깊어 푸른 강물이 되고 강에는 수천의 풀벌레가 내 울음을 대신 울며 떠나갔지요. 흐느끼는 나의 피도 물결따라 그냥 떠나갔지요. 때는 철없는 봄, 정향(丁香)나무 푸른 그늘 밑이었지요.

내 품에, 그대 눈물을/이정록

내 품에, 그대 눈물을 이정록 내 가슴은 편지봉투 같아서 그대가 훅 불면 하얀 속이 다 보이지 방을 얻고 도배를 하고 주인에게 주소를 적어 와서 그 주소로 편지를 보내는 거야 소꿉장난 같은 살림살이를 들이는 사이 우체부 아저씨가 우리를 부르면 봉숭아 씨처럼 달려나가는 거야 우리가, 같은 주소를 갖고 있구나 전자레인지 속 빵 봉지처럼 따뜻하게 부풀어오르는 우리의 사랑 내 가슴은 포도밭 종이 봉지야 그대 슬픔마저 알알이 여물 수 있지 그대 눈물의 향을 마시며 나는 바래어 가도 좋아 우표를 붙이지 않아도 그대 그늘에 다가갈 수 있는 내 사랑은 포도밭 종이 봉지야 그대의 온몸에, 내 기쁨을 주렁주렁 매달고 가을로 갈 거야 긴 장마를 건너 햇살 눈부신 가을이 될 거야

불온한 내력/이대흠

불온한 내력 이대흠 땡감 덩굴이 많은 숲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갈퀴나무를 하러 자주 왔던 곳 무덤만 즐비하다 자벌레 한 마리 가던 길 끝에서 머뭇거린다 나는 여기서 끝났을까 몸을 구부리는 벌레의 물음 표, 나는 물것의 사상을 모른다 계곡은 낮아지며 깊어진다 나는 송피를 먹지 않았고 할아버 지의 구루마를 타 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 나의 세계관 가을이여 기억의 힘으로 타오르는 붉은 잎새 들이여 당대는 괴롭다 소나무 뿌리가 박힌 버려진 무덤에서 누 군가가 나올 것만 같다 신화가 된 선조들 문득 낯선 사내 하나 말을 타고 나오면 아으 다롱디리 노래를 할까 해가 지더라도 저 석양의 이빨에 한 사흘 물렸으면 占으로 써 내리는 가을 저문 숲에서 나는 너의 인생에 의무가 없다 아들아 고집불통의 ..

달맞이꽃/김왕노

달맞이꽃 김왕노 어머니 저어기 마중나와 계시다 뼈마디 마디 끝마다 불 밝히시고 굵주린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어둠 속에 나와 계시다 날마다 나를 설거지하시다 늙은 손 굽은 등으로 마지막 남은 힘으로 등불 켜시고 저 풍전등화의 골목에 나와 계시다 여름의 구석에서 가을을 장만하는 풀벌레소리 벌써 애간장을 녹이는데 나는 가을되면 그 누구나 한번 쯤하는 이별하는 사랑 하나도 이루지 못할 덜 떨어진 놈인데 내 슬픈 길을 밝혀주려 어머니 저어기 홀로 나와 계시다

가을이 오고 있다/남궁명

가을이 오고 있다 남궁명 1. 밤마다 풀벌레 울음이 조금씩 가을을 잡아 당기고 그만큼 커피향이 깊어졌다 안경알이 맑아진 건 가을 때문이다 연필심이 사각거리며 맑아진 가을을 읽다가 밑줄을 긋는다 내 그림자는 밑줄 그어진 가을 속으로 점점 깊어지고 터엉텅, 밤은 크고 둥그런 항아리 속이다 2. 블라인드에 드리운 바람이 살랑거리며 가을의 말을 쏟아낸다 드맑고 파아란 하늘냄새가 방 안 가득 흩어진다 프린터에서 풀대궁의 서걱임이 흘러나온다 꽃향기의 모음과 사색의 자음을 투명하게 기르는 가을, 나 는 이제 하늘냄새를 녹슬지 않게 오래 고독을 가둘 것이다 3. 창 밖 먼 기적소리 들려온다 지구 저 켠의 그대가 손 흔들어 보낸 그 리움, 천만 톤의 고요를 흐르는 어둠 속 별빛이 쏟아진다 나는 별빛을 책갈피에 끼우고 밖..

칠순의 파밭/안명옥

칠순의 파밭 안명옥 늦가을 파밭, 말라버린 젖꼭지 아직도 땅에 젖을 물리고 있는 파, 곧 무서리가 내릴 텐데, 파는 얇아진 피부 위에 바람을 껴입고 살아온 것일까 까칠해진 존재의 부피만큼 잔뿌리를 내리며 시들어가던 시간 속에서, 파는 짙은 체취를 품고 있었다 파는 이제 고요하다 푸른 핏줄 끊임 없이 흔들어대던 둥근 몸의 파동도 뿌리 근처에서 멎었다 가만히 파밭의 흙을 거두어내고 젖은 잔뿌리를 들추어보니 파는 제 몸이 흔들릴 때마다 많이 울었던 모양이다 매운 제 몸의 향기로 가슴속의 아픈 생각들을 밤새 하얀 실핏줄로 풀어내고 있던 파는 제 몸의 허공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매운 향기를 갖게 된 것이다

산, 숲에 들면/박영택

산, 숲에 들면/박영택 내가 다가서기 전에 산이 나를 찾는다 산이 내 속에 들어앉자 부드러운 하늘이 꽂힌다 떡갈나무 잎 자지러지는 소리, 잔 풀들 애기 소리도 들린다 바람은 단숨에 숲을 건너지만 햇살에 걸린 나는 몇 번이고 넘어진다 기우뚱거리는 가지 위에 겨울이 앉아 나이보다 먼저 떠나는 가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지는 잎 하나 눈에 새겨 넣으면 가을 소리를 가슴에 가두니 저 흔한 죄마저 사랑하고 싶어진다 풀섶 헤치고 가슴으로 걷는 길 배인 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다 작은 바람에 풀꽃 하나 고개를 끄덕이니 산 전체가 흔들리고 전신의 내가 아프다 새는 하늘 가는 길을 몰라 가파른 골짜기 숲속으로 몸을 숨긴다 분별없는 마음은 밤새도록 밟히는 가을을 걷고 싶지만 산은 조심스레 나를 세상에 내려놓는다

가을 아침/도 혜 숙

가을 아침 도 혜 숙 한 사흘 벽만 보고 앓아눕고 싶다고, 나무의 세월이 자랄수록 갇히는 느낌이 깊다고 계절을 송신하는 그대 누구에 대한 기대를 놓아버린 걸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키작은 꽃들의 그늘이던 파초, 표피 가득 고름이 차오르고 있다 내밀하게 고이는 아픔 눈감는 자조(自嘲) 햇빛에 늘어뜨린 고독의 피부가 세상 가장자리에서부터 아려오는 가을아침, 가슴 베어물고 달아난 첫사랑이 구름꽃 무더기로 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