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690

비로 만든 집 / 류시화

비로 만든 집 류시화 비로 만든 집에서 나는 살았네 안개로 만든 집 구월의 오솔길로 만든 집 구름비나무로 만든 집 비로 만든 집에는 언제나 비가 내리지 비를 내리는 나무 비를 내리는 길 비를 내리는 염소들 세상이 슬픔으로 다가올 때마다 나는 그곳으로 가서 비를 맞았네 비의 새가 세상의 지붕 위를 날고 비를 내리는 오솔길이 비의 나무를 감추고 있는 곳 비로 만든 집에서 나는 살았네 비의 새가 저의 부리로 비를 물어 나르는 곳 세상 어디로도 갈 곳이 없을 때 나는 그곳으로 가서 비를 맞았네 비로 만든 집에는 언제나 비가 내리지 비를 내리는 나무 비를 내리는 길 비를 내리는 염소들

꽃무릇 / 성영희

꽃무릇 성영희 무리를 지으면 쓸쓸하지 않나 절간 뜰을 물들이며 흘러나간 꽃무릇이 산언덕을 지나 개울 건너 울창한 고목의 틈새까지 물들이고 있다 여린 꽃대 밀어 올려 왕관의 군락을 이룬 도솔산 기슭 꽃에 잘린 발목은 어디 두고 붉은 가슴들만 출렁이는가 제풀에 지지 않은 꽃이 있던가 그러니, 꽃을 두고 약속하는 일 그처럼 헛된 일도 없을 것이지만 저기, 천년 고찰 지루한 부처님도 해마다 꽃에 불려나와 객승과 떠중이들에게 은근하게 파계를 부추기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 화사한 말이든 무릇을 앞뒤로 붙여 허망하지 않은 일 있던가 꽃이란 무릇, 홀로 아름다우면 위험하다는 듯 같이 피고 같이 죽자고 구월의 산문(山門)을 끌고 꽃무릇, 불심에 든 소나무들 끌고 간다

다시 9월/나태주

다시 9월 나태주 기다리라 오래 오래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지루하지만 더욱 이제 치유의 계절이 찾아온다 상처받은 짐승들도 제 혀로 상처를 핥아 아픔을 잊게 되리라 가을 가을들은 봉지 안에서 살이 오르고 눈이 밝고 다리 굵은 아이들은 멀리까지 갔다가 서둘러 돌아오리라 구름 높이 높이 떴다 하늘 한 가슴에 새하얀 궁전이 솟아올랐다 이제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게 되는 시간 기다리라 더욱 오래 오래 그리고 많이.

구월이 와도/이재무

구월이 와도 이재무 구월이 와도 멀어진 사람 더욱 멀어져 아득하고 가까운 사람의 눈길조차 낯설어가고 구월이 와도 하늘은 딱딱한 송판 같고 꽃들은 피면서 지기 시작하고 마음의 더위 상한 몸 더욱 지치게 하네 구월이 와도 새들의 날개는 무겁고 별들은 이끼 낀 돌처럼 회색의 도화지에 박혀 빛나지 않고 백지 앞에서 나는 여전히 우울하고 이제는 먼 곳의 고향조차 그립지 않네 구월이 와도 나 예전처럼 설레지 않고 가는 세월의 앞치마에 때만 묻히니 나를 울고간 사랑아. 나를 살다간 나무야 꽃아 강물아 달아 하늘아 이대로 죽어도 좋으련, 좋으련 나는

9월의 소리 /황병준

9월의 소리 황병준 창밖에 떨어지는 낙엽소리 스쳐왔다 스쳐가는 계절의 뒤안길이련가 외딴 초가지붕에도 살며시 내려앉는 소리 임 그리워 울먹이다 흘러내리는 눈물 빛 가슴이 용해돼 빨갛게 타 내리는 흐름 산산이 뿌려놓은 밤하늘에 별들아 조용조용 부서져 내리는 달빛아 낙엽 지는 소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방에는 서러워 떨어지는 애절한 몸부림 계절병에 걸려 헤어나지 못해 떨어지는 소리 떨어짐이 아쉬운 낙엽들은 이대로 쓸어 갈련지 바람은 왜 성가시게도 부는지 거친 몸 죽어 안고 지각을 내려보고 마지막 남음 잎새 하나 맹인처럼 두 눈 꼭 감고 아픔과 고독에 사로잡혀 있는 산만한 주위 어디서 왔다 또 어디로 가는지? 무법의 방랑자들에 어울려 가려는지? 다음 세대를 위한 희생하는 까닭임을 죽음을 두려워 말라 빨갛게 태운 ..

9월의 어느 하루 /김경철

9월의 어느 하루 김경철 지각을 하지 않으려고 뜀박질을 한 아침 턱까지 오르는 숨을 참으며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니 웅성거리며 떠들던 사람들의 음성은 어디로 갔는지 혼자 있는 듯 쓸쓸함이 감돈다 간혹 감기에 걸린 듯 입을 막은 채 재채기와 함께 콜록콜록하며 정적을 잠시 깨트릴 뿐 시간이 멈춘 듯 마스크로 입을 가린 사람들 의자에 앉아 핸드폰과 무언의 대화에 푹 빠진다 조용하기도 하고 전날 먹은 취기마저 오르는지 무거워진 눈꺼풀이 스르르 잠기며 꾸벅꾸벅 인사를 하다 목적지인 전철역을 지나쳤는지 갑자기 눈이 떠지고 후다닥 뛰쳐나온 승강장에서 잠시 미소를 지었다 전철역을 나와 가을바람이 부는 9월의 어느 하루를 시작한다

늦여름/심호택​

늦여름 심호택​ 까막까치 대가리뿐 아니라 개 잔등이 소 엉덩이도 벗어지게 생긴 날 때 넘겨 돌아와 찬물에 밥 말아 먹고 마룻장 짊어지면 살 것 같지요 쉬파리 똥파리와 싸우며 소르르 낮잠 한소금 꿀맛이지만 가시를 머금은 듯 잠결에도 더운 들에 엎드린 식구들 생각 가여워라 가여워라 매미들 울지요 잘잤다 눈 비비고 일어나면 미루나무 그림자 늘어난 텃밭에 가을 온다 가을 온다 싸움터 하늘 비행기처럼 고추잠자리 어지러이 떠다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