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릇 / 성영희
꽃무릇 성영희 무리를 지으면 쓸쓸하지 않나 절간 뜰을 물들이며 흘러나간 꽃무릇이 산언덕을 지나 개울 건너 울창한 고목의 틈새까지 물들이고 있다 여린 꽃대 밀어 올려 왕관의 군락을 이룬 도솔산 기슭 꽃에 잘린 발목은 어디 두고 붉은 가슴들만 출렁이는가 제풀에 지지 않은 꽃이 있던가 그러니, 꽃을 두고 약속하는 일 그처럼 헛된 일도 없을 것이지만 저기, 천년 고찰 지루한 부처님도 해마다 꽃에 불려나와 객승과 떠중이들에게 은근하게 파계를 부추기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 화사한 말이든 무릇을 앞뒤로 붙여 허망하지 않은 일 있던가 꽃이란 무릇, 홀로 아름다우면 위험하다는 듯 같이 피고 같이 죽자고 구월의 산문(山門)을 끌고 꽃무릇, 불심에 든 소나무들 끌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