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690

여름의 끝자락 /정명화

여름의 끝자락 정명화 코스모스 꽃잎에 고추잠자리 기웃거리고 조석으로 시원한 바람에 그대의 계절이 오고 있어요 앞마당에 곱게 핀 백일홍이 호랑나비 초대하고 맨드라미꽃은 그대 마음 훔쳐 붉게 물들어 가고 있어요 귀뚜라미 노랫소리 듣고 싶어 도자기 항아리 준비해 놓고 지붕 위에 실하게 영글어 가는 박 가을을 기다리고 있나 봐 찬란한 여름도 가을 앞에서 힘없이 떠나갈 채비하고 여름의 끝자락을 잡고, 나는 가을을 채우려 부지런히 비우고 있어요.

여름이 떠나가며/정상만

여름이 떠나가며 정상만 매미의 애절한 마지막 절규가 세상을 향한 목놓음으로 울려질 때면 떠나는 이의 마지막 발걸음 되어 석양의 빛 속으로 조용히 사라진다 처음 왔던 그리운 그 길 따라 말없이 돌아가는 서글픈 발걸음에 예쁜 꽃잎 한 아름을 흩뿌려놓고 고운 발걸음 떠나간 그 길 따라 다시 찾아와 주기를 기다려본다 여름이 가는 소리에 가을을 맞이하듯이 서녘 하늘의 석양이 붉게 물들어 간다 귀뚜라미의 청량한 노랫소리가 가을의 문 앞에서 수더분한 미소를 지어본다

여름이 떠나가네 /김인숙

여름이 떠나가네 김인숙 여름이 떠나려 하니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밤새도록 귀뚜리의 노래는 울어도 다 못할 애끓는 노래 떠나는 사랑 잡을 수 없는 안타까운 그리움 차라리 미련도 후회도 떨치고 싶은 꿈꾸는 가을의 노래 귀뚜루루 귀뚜루루 귀뚜루루 어서 가까이 더 오시오 나 그대와 더불어 이 한 날을 슬퍼도 즐거이 노래 부르고 싶소

성숙해진 늦여름 /김재덕

성숙해진 늦여름 김재덕 삶이 질퍽거린다고 울상이던 낯짝이 누렇게 떠서인지 고개를 못 드는 벼 이삭은 겨우 울보 매미를 배웅했건만 가을의 노래밖에 할 줄 모른다는 귀뚜라미 마중하려니 코로나에 지친 허수아비가 눈에 밟힌다 곧 참새가 떼 지을 것을 안 농부의 고래고래도 귀청 따가울 건데 가뜩이나 힘겨운 허수아비의 누더기까지 찢어지겠다만 어수선한 세상이라도 할 일들 해야겠지.. 어라, 마른하늘 날벼락 친다. 산모롱이에선 아들딸 낳는 밤송이 산통에 고슴도치 될 청개구리 어쩌라고 호랑이 장가가는 걸까 휘둥그레 비구름 뚫은 해님이 을씨년스러운 오늘따라 옛사랑 만나듯 반가워도 짓궂을 햇살 때문에 육수를 꽤 흘리겠다 그나저나, 늦여름이 농익는데도 아직 시뻘겋게 달아오르지 않은 고추잠자리 보이지 않는다.

구월의 아침들 /장석주

구월의 아침들 장석주 네가 웃고 있을 때 어딘가에서 비둘기가 날 거야. 비둘기들은 웃음의 힘으로 허공을 나니까. 네가 웃지 않는다면 비둘기들은 땅으로 떨어질 거야. 골목길은 침울해지고 건널목은 몹시 상심할 거야. 누군가 웃음을 잃었다면 그건 한 계절이 끝났다는 신호야. 어제 저녁, 돌연 여름은 끝나버렸지. 슬픔들이 제 부력으로 웃음들을 흰구름만큼 높이 떠올린다는 걸 나는 알았어. 뱀들이 물푸레나무 아래서 젖은 몸을 말리지. 아침 7시에는 농담 같은 뉴스들이 흘러나오고 치매에 걸린 늙은 어머니의 손가락들이 길어질 때 갑자기 비둘기 떼가 한 방향으로 날아갔어. 이 구월의 아침들 어딘가에 네가 웃고 있다는 걸 알았어.

파도 / 신석정

파도 신석정 갈대에 숨어드는 소슬한 바람 9월이 깊었다. 철 그른 뻐구기 목멘 소리 애가 잦아 타는 노을 안쓰럽도록 어진 것과 어질지 않은 것을 남겨 놓고 이대로 차마 눈감을 수 없거늘 산을 닮아 입을 다물어도 자꾸만 가슴이 뜨거워 오는 날은 소나무 성근 숲 너머 파도소리가 유달리 달려드는 속을 부르르 떨리는 손은 주먹으로 달래 놓고 파도 밖에 트여 올 한 줄기 빛을 본다.

벌레의 작은 입을 생각한다 / 이기철

벌레의 작은 입을 생각한다 이기철 벌레의 작은 입을 생각한다, 5월에 개암 살구 오디 으름 자두 머루 다래 산딸잎을 벌레가 먹고 내가 먹는다 벌레의 맑은 눈을 생각한다, 7월에 오이 상추 가지 감자 고사리 무릇 고들빼기 참나물을 벌레가 먹고 내가 먹는다 벌레의 밝은 귀를 생각한다, 9월에 비파 참취 털머위 자주쓴풀 수세미 참깨 산오이풀 골바위취를 벌레가 먹고 내가 먹는다 그 작은 입으로 호고 박고 궁글려 만든 밝고 따뜻한 벌레의 집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