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690

가을 하늘/ 박재삼

가을 하늘 박재삼 온 산천이 푸르른 녹음만으로 덮쳐 그것이 오직 숨차기만 하더니, 바람도 그 근처에 와서 헉헉거리기만 하더니, 이제는 그 짓도 지쳤는지 울긋불긋 노란 빛으로 혹은 붉은 빛으로 부지런히 수를 놓고 있고, 거기 따라 바람도 상당히 기가 죽어 달래기만을 연출하고 있구나. 해마다 겪는 이 노릇을 완전히 파악하기는커녕 우리도 어느새 단풍이 들어 땅에 묻힐 일만이 빤히 보이는 아, 가을 하늘이 끝간대 없이 높게 높게 결국 아득하게 개였네.

가을의 기도/김현승

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 억새/정일근

가을 억새 정일근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 켜진 추억의 플랫홈에서 마지막 상행성 열차로 그개를 떠나보내며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겠는가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

가을 기도/유안진

가을 기도 유안진 불러주세요 서리치면 쓰러질 들풀같이 여린 내 이름을 찬비 내리는 가을밤에는 불빛처럼 불러주세요 나그네도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가듯이 고향집 따순 아랫목에 지친 머리 뉘이듯이 먼지 쌓인 복음책으로 저를 불러주세요 손때 묻고 어룽진 어느 행간에서 낙옆처럼 엎드려 붉게 붉게 울도록 오오 하나님 가을에는 가을에는 제 고향 말씀책으로 저를 오라 불러주세요

늦여름 /심호택​

늦여름 심호택​ 까막까치 대가리뿐 아니라 개 잔등이 소 엉덩이도 벗어지게 생긴 날 때 넘겨 돌아와 찬물에 밥 말아 먹고 마룻장 짊어지면 살 것 같지요 쉬파리 똥파리와 싸우며 소르르 낮잠 한소금 꿀맛이지만 가시를 머금은 듯 잠결에도 더운 들에 엎드린 식구들 생각 가여워라 가여워라 매미들 울지요 잘잤다 눈 비비고 일어나면 미루나무 그림자 늘어난 텃밭에 가을 온다 가을 온다 싸움터 하늘 비행기처럼 고추잠자리 어지러이 떠다니지요

여름의 끝자락 /정명화

여름의 끝자락 정명화 코스모스 꽃잎에 고추잠자리 기웃거리고 조석으로 시원한 바람에 그대의 계절이 오고 있어요 앞마당에 곱게 핀 백일홍이 호랑나비 초대하고 맨드라미꽃은 그대 마음 훔쳐 붉게 물들어 가고 있어요 귀뚜라미 노랫소리 듣고 싶어 도자기 항아리 준비해 놓고 지붕 위에 실하게 영글어 가는 박 가을을 기다리고 있나 봐 찬란한 여름도 가을 앞에서 힘없이 떠나갈 채비하고 여름의 끝자락을 잡고, 나는 가을을 채우려 부지런히 비우고 있어요.

여름 그 끝자락에서 /강봉환

여름 그 끝자락에서 강봉환 뜨겁게 달구던 태양도 갈바람에 밀려오는 노란 물결에 빛을 잃어 가는데 미루나무 가지에 우는 매미 억새풀에 앉은 여치 시도 때도 없이 여름이 아쉬워 목청 높이 울어 댄다 녹색의 푸른빛은 따가운 햇살에 움추러 들고 어느덧 푸르름이 지쳐갈 때 여름 끝자락에 드리워진 가을 그림자에 살며시 꼬리를 내린다. 지나온 여름날의 푸른 물결, 가을빛에 실어 멀리 보내면 대지에 남은 깊은 정 잊지 않고 가을 겨울 봄을 지나 푸른 날개 달고 다시 찾아오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