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712

9월 /이기철

9월 이기철 무언가 하나만은 남겨놓고 가고 싶어서 구월이 자꾸 머뭇거린다 꿈을 접은 꽃들 사이에서 나비들이 돌아갈 길을 잃고 방황한다 화사했던 꿈을 어디다 벗어놓을까 꽃들이 제 이름을 빌려 흙에 서명한다 아픈 꿈은 얼마나 긴지 그 꿈 얼마나 여리고 아픈지 아직도 비단벌레 한 마리 풀잎 위에 영문 모르고 잠들어 있다 나뭇잎이 손가락을 펴 벌레의 잠을 덮어주고 있다 잘못 온 게 아닌가 작은 바람이 생각에 잠긴다 급할 것 없다고, 서두르지 말라고 올해는 아직도 많이 남았다고 바람에 씻긴 돌들이 깨끗해진다 여름이 재어지지 않는 큰 팔을 내리고 옷이 추울까 봐 나뭇잎을 모아 제 발등을 덮는다

팔월 한가위 / 반기룡

팔월 한가위 반기룡 길가에 풀어놓은 코스모스 반가이 영접하고 황금물결 일렁이는 가을의 들녘을 바라보며 그리움과 설레임이 밀물처럼 달려오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한동안 뜸했던 친구와 친지, 친척 만나보고 모두가 어우러져 까르르 웃음 짓는 희망과 기쁨이 깃발처럼 펄럭이는 그런 날이었으면 합니다 꽉 찬 보름달처럼 풍성하고 넉넉한 인심과 인정이 샘솟아 고향길이 아무리 멀고 힘들지라도 슬며시 옛 추억과 동심을 불러내어 아름다운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 수 있는 의미 있고 소중한 팔월 한가위이었으면 합니다

구월이 와도 /이재무

구월이 와도 이재무 구월이 와도 멀어진 사람 더욱 멀어져 아득하고 가까운 사람의 눈길조차 낯설어가고 구월이 와도 하늘은 딱딱한 송판 같고 꽃들은 피면서 지기 시작하고 마음의 더위 상한 몸 더욱 지치게 하네 구월이 와도 새들의 날개는 무겁고 별들은 이끼 낀 돌처럼 회색의 도화지에 박혀 빛나지 않고 백지 앞에서 나는 여전히 우울하고 이제는 먼 곳의 고향조차 그립지 않네 구월이 와도 나 예전처럼 설레지 않고 가는 세월의 앞치마에 때만 묻히니 나를 울고간 사랑아. 나를 살다간 나무야 꽃아 강물아 달아 하늘아 이대로 죽어도 좋으련, 좋으련 나는

9월의 소리/황병준

9월의 소리 황병준 창밖에 떨어지는 낙엽소리 스쳐왔다 스쳐가는 계절의 뒤안길이련가 외딴 초가지붕에도 살며시 내려앉는 소리 임 그리워 울먹이다 흘러내리는 눈물 빛 가슴이 용해돼 빨갛게 타 내리는 흐름 산산이 뿌려놓은 밤하늘에 별들아 조용조용 부서져 내리는 달빛아 낙엽 지는 소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방에는 서러워 떨어지는 애절한 몸부림 계절병에 걸려 헤어나지 못해 떨어지는 소리 떨어짐이 아쉬운 낙엽들은 이대로 쓸어 갈련지 바람은 왜 성가시게도 부는지 거친 몸 죽어 안고 지각을 내려보고 마지막 남음 잎새 하나 맹인처럼 두 눈 꼭 감고 아픔과 고독에 사로잡혀 있는 산만한 주위 어디서 왔다 또 어디로 가는지? 무법의 방랑자들에 어울려 가려는지? 다음 세대를 위한 희생하는 까닭임을 죽음을 두려워 말라 빨갛게 태운 ..

9월의 어느 하루 /김경철

9월의 어느 하루 김경철 지각을 하지 않으려고 뜀박질을 한 아침 턱까지 오르는 숨을 참으며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니 웅성거리며 떠들던 사람들의 음성은 어디로 갔는지 혼자 있는 듯 쓸쓸함이 감돈다 간혹 감기에 걸린 듯 입을 막은 채 재채기와 함께 콜록콜록하며 정적을 잠시 깨트릴 뿐 시간이 멈춘 듯 마스크로 입을 가린 사람들 의자에 앉아 핸드폰과 무언의 대화에 푹 빠진다 조용하기도 하고 전날 먹은 취기마저 오르는지 무거워진 눈꺼풀이 스르르 잠기며 꾸벅꾸벅 인사를 하다 목적지인 전철역을 지나쳤는지 갑자기 눈이 떠지고 후다닥 뛰쳐나온 승강장에서 잠시 미소를 지었다 전철역을 나와 가을바람이 부는 9월의 어느 하루를 시작한다

구월의 아침들 /장석주

구월의 아침들 장석주 네가 웃고 있을 때 어딘가에서 비둘기가 날 거야. 비둘기들은 웃음의 힘으로 허공을 나니까. 네가 웃지 않는다면 비둘기들은 땅으로 떨어질 거야. 골목길은 침울해지고 건널목은 몹시 상심할 거야. 누군가 웃음을 잃었다면 그건 한 계절이 끝났다는 신호야. 어제 저녁, 돌연 여름은 끝나버렸지. 슬픔들이 제 부력으로 웃음들을 흰구름만큼 높이 떠올린다는 걸 나는 알았어. 뱀들이 물푸레나무 아래서 젖은 몸을 말리지. 아침 7시에는 농담 같은 뉴스들이 흘러나오고 치매에 걸린 늙은 어머니의 손가락들이 길어질 때 갑자기 비둘기 떼가 한 방향으로 날아갔어. 이 구월의 아침들 어딘가에 네가 웃고 있다는 걸 알았어.

파도 / 신석정

파도 신석정 갈대에 숨어드는 소슬한 바람 9월이 깊었다. 철 그른 뻐구기 목멘 소리 애가 잦아 타는 노을 안쓰럽도록 어진 것과 어질지 않은 것을 남겨 놓고 이대로 차마 눈감을 수 없거늘 산을 닮아 입을 다물어도 자꾸만 가슴이 뜨거워 오는 날은 소나무 성근 숲 너머 파도소리가 유달리 달려드는 속을 부르르 떨리는 손은 주먹으로 달래 놓고 파도 밖에 트여 올 한 줄기 빛을 본다.

벌레의 작은 입을 생각한다 / 이기철

벌레의 작은 입을 생각한다 이기철 벌레의 작은 입을 생각한다, 5월에 개암 살구 오디 으름 자두 머루 다래 산딸잎을 벌레가 먹고 내가 먹는다 벌레의 맑은 눈을 생각한다, 7월에 오이 상추 가지 감자 고사리 무릇 고들빼기 참나물을 벌레가 먹고 내가 먹는다 벌레의 밝은 귀를 생각한다, 9월에 비파 참취 털머위 자주쓴풀 수세미 참깨 산오이풀 골바위취를 벌레가 먹고 내가 먹는다 그 작은 입으로 호고 박고 궁글려 만든 밝고 따뜻한 벌레의 집을 생각한다

꽃무릇 / 성영희

꽃무릇 성영희 무리를 지으면 쓸쓸하지 않나 절간 뜰을 물들이며 흘러나간 꽃무릇이 산언덕을 지나 개울 건너 울창한 고목의 틈새까지 물들이고 있다 여린 꽃대 밀어 올려 왕관의 군락을 이룬 도솔산 기슭 꽃에 잘린 발목은 어디 두고 붉은 가슴들만 출렁이는가 제풀에 지지 않은 꽃이 있던가 그러니, 꽃을 두고 약속하는 일 그처럼 헛된 일도 없을 것이지만 저기, 천년 고찰 지루한 부처님도 해마다 꽃에 불려나와 객승과 떠중이들에게 은근하게 파계를 부추기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 화사한 말이든 무릇을 앞뒤로 붙여 허망하지 않은 일 있던가 꽃이란 무릇, 홀로 아름다우면 위험하다는 듯 같이 피고 같이 죽자고 구월의 산문(山門)을 끌고 꽃무릇, 불심에 든 소나무들 끌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