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712

혹서 일기 /박재삼

혹서 일기 박재삼 ​ 잎 하나 까딱 않는 30 몇 도의 날씨 속 그늘에 앉았어도 소나기가 그리운데 ​ 막혔던 소식을 뚫듯 매미 울음 한창이다. 계곡에 발 담그고 한가로운 부채질로 성화같은 더위에 달래는 것이 전부다. ​ 예닐곱 적 아이처럼 물장구를 못 치네. 늙기엔 아직도 멀어 청춘이 만 리인데 ​ 이제 갈 길은 막상 얼마 안 남고 그 바쁜 조바심 속에 절벽만을 두드린다.

8월이 가기 전에/오광수

8월이 가기 전에 오광수 ​ 8월이 다 가기 전에 조금 남아있는 젖은 가슴으로 따가운 후회를 해야겠다. ​ 삶에 미련이 많은 만큼 당당하지를 못해서 지나온 길 부끄러움으로 온갖 멍이 들어 있는데도 어찌하지 못하고 또 달을 넘겨야 하느냐? ​ 나의 나약함이여, 나의 비굴함이여, 염천 더위에 널브러진 초라한 변명이여, 등에 붙은 세 치 혀는 또 물 한 바가지를 구걸하고 소리 없는 고함은 허공에서 회색 웅덩이를 만드는 데 땅을 밟았다는 두 발은 흐르는 물에 밀려 길을 잃고 있구나. ​ 8월이 간다 이 8월이 다 가기 전에 빈손이지만 솔직하게 펼쳐놓고 다가올 새날에는 지친 그늘에게 물 부어주고 허공의 회색 웅덩이는 기도로 불러다 메워가고 물빛에 흔들리는 눈빛이라면 발걸음을 멈추자. ​ 머지않아 젖어있는 이 가슴..

팔월 /공성진

팔월 공성진 실성하여 미쳐 버린 듯 훠이훠이 훠어이 오장육부 삶아내는 불춤을 춘다. ​ 열풍은 얄궂게 박자를 맞추고 숨통을 조이는 절정의 격렬한 춤사위 ​ 넋빠진 무의식에 뺨을 갈기는 간간이 오뚝이처럼 정신 차려 벌떡 일어나 보지만 ​ 고갈된 체액에 혼미하여 비틀거리다 털버덕 엎어져 녹아내리는 길바닥에 그리움조차 밀어내려고 얼굴을 뭉갠 채 ​ 망각하여라. 망각하여라. 점점 사그라지는 열정에 분노하는 터무니 없이 무기력한 팔월

팔월/박인걸

팔월 박인걸 ​ 해마다 팔월이면 태양이 가깝게 다가와 숲은 가마솥이 되고 대지는 화덕이다. ​ 풀벌레는 자지러지고 새들은 그늘로 숨지만 바람의 풀무질이 열기를 불어넣을 때면 푸른 생명들은 조용히 찬가를 부른다. ​ 우주의 에너지가 구석구석 파고들 때면 잎사귀마다 춤을 추며 여름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 대추가 소리 없이 여물고 고구마도 큰 꿈을 키워가는 팔월에는 너와 나의 사랑도 여물어 가려나

8월이 오는 소리/이효녕

8월이 오는 소리 이효녕 사랑이 너무 뜨거워 마음 둘 곳 없는 여름 하늘에 별을 바라보며 설친 잠 별빛 따라 가는 발자국 소리 푸른 나뭇잎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몇 개의 길 위에 부는 바람 소리 파도의 하얀 꿈을 모아 소라껍질 깊이 담는 소리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별빛이 몸을 더듬는 소리 넓은 초원 풀잎에 맺힌 이슬 그리움으로 구르는 소리 가냘픈 그 숨결 소리 짓눌린 가슴 열어 놓습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뜨거운 숨결이 느낌으로 오는 여름 내 마음 연록색 잎사귀 돋아내 더위에 지친 그대의 그늘 만듭니다

8월의 바다 /김소엽

8월의 바다 김소엽 너를 마주하면 옥빛 하늘이 품 안에 있고 네 눈 속엔 쪽빛 바다가 넘친다. 우울한 날엔 네 목소리에 등 (燈)을 달고 바다로 가자 수평선도 없는 밤의 파도 멀리 등대가 된 네 목소리. 어둠을 쏘는 8월의 태양 원색이 녹아 흐르는 달빛의 해변 젊은이 수없이 밀리는 파도여 너를 마주하면 파도가 꿈틀대고 너와 난 한 밤 내 섬이 되고 온 세상 바다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