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711

비로 만든 집 / 류시화

비로 만든 집 류시화 비로 만든 집에서 나는 살았네 안개로 만든 집 구월의 오솔길로 만든 집 구름비나무로 만든 집 비로 만든 집에는 언제나 비가 내리지 비를 내리는 나무 비를 내리는 길 비를 내리는 염소들 세상이 슬픔으로 다가올 때마다 나는 그곳으로 가서 비를 맞았네 비의 새가 세상의 지붕 위를 날고 비를 내리는 오솔길이 비의 나무를 감추고 있는 곳 비로 만든 집에서 나는 살았네 비의 새가 저의 부리로 비를 물어 나르는 곳 세상 어디로도 갈 곳이 없을 때 나는 그곳으로 가서 비를 맞았네 비로 만든 집에는 언제나 비가 내리지 비를 내리는 나무 비를 내리는 길 비를 내리는 염소들

꽃무릇 / 성영희

꽃무릇 성영희 무리를 지으면 쓸쓸하지 않나 절간 뜰을 물들이며 흘러나간 꽃무릇이 산언덕을 지나 개울 건너 울창한 고목의 틈새까지 물들이고 있다 여린 꽃대 밀어 올려 왕관의 군락을 이룬 도솔산 기슭 꽃에 잘린 발목은 어디 두고 붉은 가슴들만 출렁이는가 제풀에 지지 않은 꽃이 있던가 그러니, 꽃을 두고 약속하는 일 그처럼 헛된 일도 없을 것이지만 저기, 천년 고찰 지루한 부처님도 해마다 꽃에 불려나와 객승과 떠중이들에게 은근하게 파계를 부추기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 화사한 말이든 무릇을 앞뒤로 붙여 허망하지 않은 일 있던가 꽃이란 무릇, 홀로 아름다우면 위험하다는 듯 같이 피고 같이 죽자고 구월의 산문(山門)을 끌고 꽃무릇, 불심에 든 소나무들 끌고 간다

고등어 산다 / 나태주

고등어 산다 나태주 맨드라미 피어서 붉은 9월도 초순의 저녁 무렵 제민천 따라서 자전거 타고 하루도 저물어 집에 가다 간고등어 안동 간고등어 네 손에 만 원 외치는 소리 자전거 내려서 고등어 산다 집에 가지고 가보았자 먹을 입도 없는데 뭘 이런 거 사 왔느냐 집사람 핀잔하고 외면할지 몰라도 어려서 외할머니 밥상에서 수저에 얹어 주시던 고등어 문득 생각나서 고등어 산다

밀림 도서관 / 최준

밀림 도서관 최준 추장이 죽었다 9월 새들의 비망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먹구름을 끌고 마지막 벌크선이 사라진 행간으로 비가 내렸다 눈 먼 나무들이 나이테를 배회하는 동안 추장의 빈소, 도서관 가는 길은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아서 지워져 버렸나 천둥과 번개의 두근거림만으로도 슬픔은 한이 없었다 너무 긴 우기였다고, 헐거워진 창틀마다 이마에 화살 맞은 원숭이들이 바나나 잎 가면을 쓰고 앉아 책장을 넘겼다 문 잠긴 장서고는 꼬리처럼 어두웠다 반년에 걸친 추장의 장례식이 끝난 건 새들의 비망록 속 비밀지도가 날개를 잃고 멍청한 얼굴로 도보여행을 시작한 3월이었다 도서관을 리모델링하려는 공공연한 도벌이 다시 시작되었지만 추장의 죽음은 발설되어서는 안 될 영원한 비밀 결코 회자되지 못할 새들의 비망록도 추장이 죽었다..

9월의 시/조병화

9월의 시 조병화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의 여름만큼 무거워지는 법이다 스스로 지나온 그 여름만큼 그만큼 인간은 무거워지는 법이다 또한 그만큼 가벼워지는 법이다 그리하여 그 가벼운만큼 가벼이 가볍게 가을로 떠나는 법이다 기억을 주는 사람아 기억을 주는 사람아 여름으로 긴 생명을 이어주는 사람아 바람결처럼 물결처럼 여름을 감도는 사람아 세상사 떠나는 거 비치파라솔은 접히고 가을이 온다

9월의 시/이해인

9월의 시 이해인 저 찬란한 태양 마음의 문을 열어 온 몸으로 빛을 느끼게 하소서 우울한 마음 어두운 마음 모두 지워버리고 밝고 가벼운 마음으로 9월의 길을 나서게 하소서 꽃 길을 거닐고 높고 푸르른 하늘을 바라다 보며 자유롭게 비상하는 꿈이 있게 하소서 꿈을 말하고 꿈을 쓰고 꿈을 노래하고 꿈을 춤추게 하소서 이 가을에 떠나게 말게 하시고 이 가을에 사랑이 더 깊어지게 하소서

9월의 시/문병란

9월의 시 문병란 9월이 오면 해변에선 벌써 이별이 시작된다 나무들은 모두 무성한 여름을 벗고 제자리에 돌아와 호올로 선다 누군가 먼 길 떠나는 준비를 하는 저녁, 가로수들은 일렬로 서서 기도를 마친 여인처럼 고개를 떨군다 울타리에 매달려 전별을 고하던 나팔꽃도 때묻은 손수건을 흔들고 플라타너스 넓은 잎들은 무성했던 여름 허영의 옷을 벗는다 후회는 이미 늦어버린 시간 먼 항구에선 벌써 이별이 시작되고 준비되지 않은 마음 눈물에 젖는다. - 1994년 시선집 (일월서각)

9월 /이기철

9월 이기철 무언가 하나만은 남겨놓고 가고 싶어서 구월이 자꾸 머뭇거린다 꿈을 접은 꽃들 사이에서 나비들이 돌아갈 길을 잃고 방황한다 화사했던 꿈을 어디다 벗어놓을까 꽃들이 제 이름을 빌려 흙에 서명한다 아픈 꿈은 얼마나 긴지 그 꿈 얼마나 여리고 아픈지 아직도 비단벌레 한 마리 풀잎 위에 영문 모르고 잠들어 있다 나뭇잎이 손가락을 펴 벌레의 잠을 덮어주고 있다 잘못 온 게 아닌가 작은 바람이 생각에 잠긴다 급할 것 없다고, 서두르지 말라고 올해는 아직도 많이 남았다고 바람에 씻긴 돌들이 깨끗해진다 여름이 재어지지 않는 큰 팔을 내리고 옷이 추울까 봐 나뭇잎을 모아 제 발등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