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712

견딜 수 없네 / 정현종

견딜 수 없네 정현종 갈수록, 일월(日月) 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개똥벌레 / 평보

개똥벌레 평보 ​ 구봉산 작은 폭포 옆에 달은 밝다 못해 눈이 부시다. 반디 불이다! 저 기저귀 좀 봐 빛을 발산하며 곡선으로 추상화를 놓는다. 암울한 세상을 희망으로 하 잔다. ​ 가지 마라 가지 마라 점 장이 한 잔 대로 하였으면 세상을 밝게나 하거라. 어둠과 빛을 가르면 불쌍한 것 너 아니고 민초들이라. ​ 옛사람 풍류로 시조하던 침류 댄(枕流臺) 반딧불이 춤을 춘다. 세월 좋다. 노래하고 춤을 춘다. 가지 마라. ​ 가지 마라. 세상은 깜깜한데 스스로 빛을 난들 등불이 되겠느냐?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희망을 주고 가거라.

여름밤 /이준관

여름밤 이준관 ​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여름밤은 뜬눈으로 지새우자. ​ 아들아, 내가 이야기를 하마. 무릎 사이에 얼굴을 꼭 끼고 가까이 오라. 하늘의 저 많은 별들이 우리들을 그냥 잠들도록 놓아주지 않는구나. ​ 나뭇잎에 진 한낮의 태양이 회중전등을 켜고 우리들의 추억을 깜짝깜짝 깨워놓는구나. ​ 아들아, 세상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은 너는 밤새 물어라. 저 별들이 아름다운 대답이 되어줄 것이다. ​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 열 손가락에 달을 달아주마. 달이 시들면 손가락을 펴서 하늘가에 달을 뿌려라.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 짧은 여름밤이 다 가기 전에 (그래, 아름다운 것은 짧은 법!) 뜬눈으로 눈이 빨개지도록 아름다움을 보자.

여름 낙조 /송수권

여름 낙조 송수권 ​ 왜 채석 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 나는 지금 만 권의 책을 쌓아 놓고 글을 읽는다. 만 권의 책, 파도가 와서 핥고 핥는 절벽의 단애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 ​ 나의 전 재산을 다 털어도 사지 못할 만 권의 책 오늘은 내가 쓴 초라한 저서 몇 권을 불지르고 이 한바다에 재를 날린다. ​ 켜켜이 쌓은 책 속에 무일푼 좀처럼 세 들어 산다 왜 채석 강변에 사느냐 묻지 말아라. ​ 고통에 찬 나의 신음 하늘에 닿았다 한들 끼룩끼룩 울며 서해를 나는 저 변산 갈매기 만 큼이야 하겠느냐 물 썬 다음 저 뻘밭에 피는 물 잎새들 만 큼이야 자욱하겠느냐 ​ 그대여, 서해에 와서 지는 낙조를 보고 울기 전에 왜 나 채석 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

여름 능소화 /정끝별

여름 능소화 정끝별 ​ 꽃의 눈이 감기는 것과 꽃의 손이 덩굴지는 것과 꽃의 입이 다급히 열리는 것과 꽃의 허리가 한껏 휘어지는 것이 ​ 벼랑이 벼랑 끝에 발을 묻듯 허공이 허공의 가슴에 달라붙듯 벼랑에서 벼랑을 허공에서 허공을 돌파하며 ​ 홍수가 휩쓸고 간 뒤에도 붉은 목젖을 돋우며 더운 살꽃을 피워내며 오뉴월 불 든 사랑을 저리 천연스레 완성하고 있다니! ​ 꽃의 살갗이 바람 드는 것과 꽃의 마음이 붉게 멍드는 것과 꽃의 목울대에 비린내가 차오르는 것과 꽃의 온몸이 저리 환히 당겨지는 것까지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의 끝 이성복 ​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그늘 만들기 /홍소희

그늘 만들기 홍소희 ​ 8월의 땡볕 아래에 서면 내가 가진 그늘이 너무 작았네 손바닥 하나로 하늘 가리고 애써 이글대는 태양을 보면 ​ 홀로 선 내 그림자 너무 작았네 벗이여, 이리 오세요 홀로 선 채 이 세상 슬픔이 지워지나요 ​ 나뭇잎과 나뭇잎이 손잡고 한여름 감미로운 그늘을 만들어 가듯 우리도 손깍지를 끼워봅시다. ​ 나 근심이 나의 근심이 되고 네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때로 벗이여, 우리도 서로의 그늘 아래 쉬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