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 수 없네 / 정현종 견딜 수 없네 정현종 갈수록, 일월(日月) 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좋은 시 느낌하나 2022.09.02
개똥벌레 / 평보 개똥벌레 평보 구봉산 작은 폭포 옆에 달은 밝다 못해 눈이 부시다. 반디 불이다! 저 기저귀 좀 봐 빛을 발산하며 곡선으로 추상화를 놓는다. 암울한 세상을 희망으로 하 잔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점 장이 한 잔 대로 하였으면 세상을 밝게나 하거라. 어둠과 빛을 가르면 불쌍한 것 너 아니고 민초들이라. 옛사람 풍류로 시조하던 침류 댄(枕流臺) 반딧불이 춤을 춘다. 세월 좋다. 노래하고 춤을 춘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세상은 깜깜한데 스스로 빛을 난들 등불이 되겠느냐?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희망을 주고 가거라. 좋은 시 느낌하나 2022.09.01
여름밤 /이준관 여름밤 이준관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여름밤은 뜬눈으로 지새우자. 아들아, 내가 이야기를 하마. 무릎 사이에 얼굴을 꼭 끼고 가까이 오라. 하늘의 저 많은 별들이 우리들을 그냥 잠들도록 놓아주지 않는구나. 나뭇잎에 진 한낮의 태양이 회중전등을 켜고 우리들의 추억을 깜짝깜짝 깨워놓는구나. 아들아, 세상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은 너는 밤새 물어라. 저 별들이 아름다운 대답이 되어줄 것이다.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 열 손가락에 달을 달아주마. 달이 시들면 손가락을 펴서 하늘가에 달을 뿌려라.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짧은 여름밤이 다 가기 전에 (그래, 아름다운 것은 짧은 법!) 뜬눈으로 눈이 빨개지도록 아름다움을 보자. 좋은 시 느낌하나 2022.08.31
여름 낙조 /송수권 여름 낙조 송수권 왜 채석 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 나는 지금 만 권의 책을 쌓아 놓고 글을 읽는다. 만 권의 책, 파도가 와서 핥고 핥는 절벽의 단애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 나의 전 재산을 다 털어도 사지 못할 만 권의 책 오늘은 내가 쓴 초라한 저서 몇 권을 불지르고 이 한바다에 재를 날린다. 켜켜이 쌓은 책 속에 무일푼 좀처럼 세 들어 산다 왜 채석 강변에 사느냐 묻지 말아라. 고통에 찬 나의 신음 하늘에 닿았다 한들 끼룩끼룩 울며 서해를 나는 저 변산 갈매기 만 큼이야 하겠느냐 물 썬 다음 저 뻘밭에 피는 물 잎새들 만 큼이야 자욱하겠느냐 그대여, 서해에 와서 지는 낙조를 보고 울기 전에 왜 나 채석 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 좋은 시 느낌하나 2022.08.30
여름 능소화 /정끝별 여름 능소화 정끝별 꽃의 눈이 감기는 것과 꽃의 손이 덩굴지는 것과 꽃의 입이 다급히 열리는 것과 꽃의 허리가 한껏 휘어지는 것이 벼랑이 벼랑 끝에 발을 묻듯 허공이 허공의 가슴에 달라붙듯 벼랑에서 벼랑을 허공에서 허공을 돌파하며 홍수가 휩쓸고 간 뒤에도 붉은 목젖을 돋우며 더운 살꽃을 피워내며 오뉴월 불 든 사랑을 저리 천연스레 완성하고 있다니! 꽃의 살갗이 바람 드는 것과 꽃의 마음이 붉게 멍드는 것과 꽃의 목울대에 비린내가 차오르는 것과 꽃의 온몸이 저리 환히 당겨지는 것까지 좋은 시 느낌하나 2022.08.29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좋은 시 느낌하나 2022.08.28
美 /박용하 美 박용하 삶이 한 번뿐이 듯 죽음도 한 번뿐이다. 단 한 번 태어난 죽음 - 기릴 일이다. 연못에서는 잉어가 수면을 깨며 날개를 젓는다. 여름이 가고 있다. 좋은 시 느낌하나 2022.08.27
그늘 만들기 /홍소희 그늘 만들기 홍소희 8월의 땡볕 아래에 서면 내가 가진 그늘이 너무 작았네 손바닥 하나로 하늘 가리고 애써 이글대는 태양을 보면 홀로 선 내 그림자 너무 작았네 벗이여, 이리 오세요 홀로 선 채 이 세상 슬픔이 지워지나요 나뭇잎과 나뭇잎이 손잡고 한여름 감미로운 그늘을 만들어 가듯 우리도 손깍지를 끼워봅시다. 나 근심이 나의 근심이 되고 네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때로 벗이여, 우리도 서로의 그늘 아래 쉬어 갑시다. 좋은 시 느낌하나 2022.08.26
여름밤 /문인수 여름밤 문인수 저인망의 어둠이 온다. 더 많이 군데군데 별 돋으면서 가뭄 타는 들녘 콩 싹 터져 오르는 소리 난다. 가마솥 가득 푹 삶긴 더위 솥검정 같은 이 더위를 반짝반짝 먹고 있다. 보리밥에 장아찌 씹듯 저 별들이 먹고 있다, 좋은 시 느낌하나 2022.08.25
여름밤 /문인수 여름밤 문인수 저인망의 어둠이 온다. 더 많이 군데군데 별 돋으면서 가뭄 타는 들녘 콩 싹 터져 오르는 소리 난다. 가마솥 가득 푹 삶긴 더위 솥검정 같은 이 더위를 반짝반짝 먹고 있다. 보리밥에 장아찌 씹듯 저 별들이 먹고 있다, 좋은 시 느낌하나 2022.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