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느낌하나 5713

8월/안재동

8월 안재동 너만큼 기나긴 시간 뜨거운 존재 없느니. 뉜들 그 뜨거움 함부로 삭힐 수 있으리. 사랑은 뜨거워야 좋다는데 뜨거워서 오히려 미움받는 천더기. 너로 인해 사람들 몸부림치고 도망 다니고 하루빨리 사라지라 짜증이지. 그래도 야속타 않고 어머니처럼 묵묵히 삼라森羅 생물체들 품속에 다정히 끌어안고 익힐 건 제대로 익혀내고 삭힐 건 철저히 삭혀내는 전능의 손길. 언젠가는 홀연히 가고 없을 너를 느끼며 내 깊은 곳 깃든, 갖은 찌끼조차 네 속에서 흔적 없이 삭혀버리고 싶다. 때 되면 깊고 긴 어둠 속으로 스스로 사라질,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사랑.

8월의 소망/오광수

8월의 소망 오광수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가 반가운 8월엔 소나기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만나면 그렇게 반가운 얼굴이 되고 만나면 시원한 대화에 흠뻑 젖어버리는 우리의 모습이면 얼마나 좋으랴? 푸름이 하늘까지 차고 넘치는 8월에 호젓이 붉은 나무 백일홍 밑에 누우면 바람이 와서 나를 간지럽게 하는가 아님 꽃잎으로 다가온 여인의 향기인가 붉은 입술의 키스는 얼마나 달콤하랴? 8월엔 꿈이어도 좋다. 아리온의 하프소리를 듣고 찾아온 돌고래같이 그리워 부르는 노래를 듣고 보고픈 그 님이 백조를 타고 먼먼 밤하늘을 가로질러 찾아왔으면,

8월의 기도/임영준

8월의 기도 임영준 이글거리는 태양이 꼭 필요한 곳에만 닿게 하소서 가끔씩 소나기로 찾아와 목마른 이들에게 감로수가 되게 하소서 옹골차게 여물어 온 세상을 풍요롭게 하소서 보다 더 후끈하고 푸르러 추위와 어둠을 조금이라도 덜게 하소서 갈등과 영욕에 일그러진 초상들을 싱그러운 산과 바다로 다잡아 다시 시작하게 하소서

팔월 연못에서/주용일

팔월 연못에서 주용일 시절 만난 연꽃 피었다 그 연꽃 아름답다 하지 마라 더러움 딛지 않고 피는 꽃 어디 있으랴 오욕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삶 어디 있으랴 생각해 보면 우리도 음부에서 피어난 꽃송이다 애초 생명의 자리는 늪이거나 뻘이거나 자궁이거나 얼마큼 질척이고 얼마쯤 더럽고 얼마쯤 냄새나고 얼마쯤 성스러운 곳이다 진흙 속의 연꽃 성스럽다 하지 마라 진흙 구멍에 처박히지 않고 진흙 구멍에 뿌리박지 않은 생 어디 있으랴

팔월의 시/오세영

팔월의 시 오세영 8월은 오르던 길을 멈추고 한번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 달이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가는 파도가 오는 파도를 만나듯 인생이란 가는 것이 또한 오는 것. 풀섶에 산나리, 초롱꽃이 한창인데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법석이는데, 8월은 정상에 오르기 전 한번쯤 녹음에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 산을 생각하는 달이다.

7월의 시/김태은

7월의 시 김태은 산이나 들이나 모두 초록빛 연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보일 듯 보일 듯 임의 얼굴 환시를 보는 것도 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한적하고 쓸쓸한 노을지는 창가에서 눈물을 견디고 슬픔을 견디는 것은 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눅눅한 그림자까지 초록빛으로 스며드는 7월의 녹음 나무는 나무끼리 바람은 바람끼리 모여 사는데 홀로 있어 외롭지 않음은 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깊은 산 속 작은 옹달샘을 찾아 애절히 불타는 이 가슴을 식혀볼까, 6월도 저물어 한 해의 반나절이 잦아드는데 노을빛 가슴을 숨기고 애연히 그리움으로 흐르는 것은 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땡볕/손광세

땡볕 손광세 7월이 오면 그리 크지 않는 도시의 변두리쯤 허름한 완행버스 대합실을 찾아가고 싶다. 죽이 다 된 캐러멜이랑 다리 모자라는 오징어랑 구레나룻 가게 주인의 남도 사투리를 만날 수 있겠지. 함지에 담긴 옥수수 몇 자루랑 자불자불 조는 할머니 눈부신 낮꿈을 만날 수 있겠지. 포플린 교복 다림질해 입고 고향 가는 차 시간을 묻는 흑백사진 속의 여학생 잔잔한 파도를 만날 수 있고 떠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며 행려승의 밀짚모자에 살짝 앉아 쉬는 밀잠자리도 만날 수 있겠지. 웃옷을 벗어 던진 채 체인을 죄고 기름칠을 하는 자전거방 점원의 건강한 웃음이랑 오토바이 세워 놓고 백미러 들여다보며 여드름 짜는 교통 경찰관의 초록빛 선글라스를 만날지도 몰라. 7월이 오면 시멘트 뚫고 나온 왕바랭이랑 쏟아지는 땡볕 ..

7월의 천사/장수남

7월의 천사 장수남 칠월의 장마비가 쉬어가는 듯 잠시 목을 축이고 늦은 새벽 정형외과 632호 병실 창가 커튼 사이로 기웃거리며 엷은 아침햇살이 한 가닥 길게 내려앉는다 어제 떠난 두 사람 주인 보낸 침대 위엔 아픔의 상처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빈자리만 지키고 있다 나는 언제쯤 퇴원할까 마음만은 가볍지가 않다 만나야 할 사람 설렘 반 기다림 반 그리움이 넘칠 때 병실 출입문이 살짝 열리더니 가을 낙엽 위에 이슬 구르는 작은 목소리 혈압시간이에요 백의천사 환한 미소가 아침햇살 가득히 병실 안을 꽉 채워준다

7월/홍일표

7월 홍일표 은행나무가 세상의 빛을 다 모아 초록의 알 속에 부지런히 쟁여넣고 있네 이파리 사이로 슬몃슬몃 보이는 애기 부처의 동그란 이마 같은 말, 말씀들 무심히 지나치면 잘 보이지도 않는 한결같이 동글동글 유성음으로 흐르는 푸른 음성들 그 사이로 푸득푸득 파랑새 날고, 긴 개울이 물비늘 반짝이며 흐르는 나무 아래, 물가를 떠난 숨가쁜 돌멩이 말씀에 오래 눈 맞추어 온몸이 파랗게 젖네 그렇게 길 위의 돌멩이 떠듬떠듬 꽃피기 시작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