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겠다, 마량에 가면/ 이재무 좋겠다, 마량에 가면 이재무 몰래 숨겨놓은 애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포구에 가서 한 석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 좋은 시 느낌하나 2008.02.25
두실역 일번 출입구 / 최정란 두실역 일번 출입구 / 최정란 퇴근길, 지하도 계단을 올라서면 맥도날드 불빛을 등지고 일 트럭 한 대가 가파른 작은 불빛을 밝히고 있다 그 불빛 아래 손짓으로만 말하는 두 사람 이마에 맺힌 근심을 닦으며 말을 굽는다 말과 말 사이, 사이 숨을 고르는 손으로 꽃 모양 틀에 묽게 풀린 소리의 반죽을 .. 좋은 시 느낌하나 2008.02.23
겨울 숲에서 / 안도현 겨울 숲에서 / 안도현 참나무 자작나무 마른 잎사귀를 밟으며 첫눈이 내립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왠지 그대가 올 것 같아 나는 겨울 숲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나는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이 계절에서 저 계절을 기다리는 헐벗은 나무들도 모두 그래서 사.. 좋은 시 느낌하나 2008.02.23
눈뜬 장님 / 최영철 눈뜬 장님 / 최영철 이 밤, 가만히 아내의 안경을 끼어봅니다 눈뜬 장님이 됩니다 그랬나 봅니다, 詩만 바라보는 꿈만 꾸는 눈으로 사는 그런 남편이 놓친 주위를 살피고 현실을 챙겼나봅니다 술픔은커녕, 우울 한 줄 읽지 못하는 돋보기 너머 흔들리는 괜스레 흔들리는 잠든 아내 얼굴을 보면서 투박한.. 좋은 시 느낌하나 2008.02.23
묵언의 날 / 고진하 묵언의 날 / 고진하 하루종일 입을 봉하기로 한 날. 마당귀에 엎어져 있는 빈 항아리들를 보았다. 쌀을 넣었던 항아리, 겨를 담았던 항아리, 된장을 익히던 항아리, 술을 빚었던 항아리들. 하지만 지금은 속엣것들을 말끔히 비워내고 거꾸러 엎어져 있다. 시끄러운 세상을 향한 시위일까, 고행일까, 큰 .. 좋은 시 느낌하나 2008.02.21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박시교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박시교 그리운 이름 하나 가슴에 묻고 산다 지워도 돋는 풀꽃 아련한 향기 같은 그 이름 눈물을 훔치면서 뇌어 본다 어머니 좋은 시 느낌하나 2008.02.21
팽이 / 최문자 팽이 / 최문자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하나님, 팽이 치러 나오세요 무명 타래 엮은 줄로 나를 챙챙 감았다가 얼음판 위에 휙 내던지고, 괜찮아요 심장을 퍽퍽 갈기세요 죽었다가도 일어설게요 뺨을 맞고 하얘진 얼굴로 아무 기둥도 없이 서 있는 이게, 선 줄 알면 다시 쓰러지는 이게 제 사랑입니.. 좋은 시 느낌하나 2008.02.21
나무 한 권의 낭독 / 고영민 나무 한 권의 낭독 / 고영민 바람은 침을 발라 나무의 낱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다 언제쯤 나도 저러한 속독을 배울 수 있을까 한 나무의 배경으로 흔들리는 서녘이 한 권의 감동으로 오래도록 붉다 얼마나 읽고 또 읽었으면 저렇게 너덜너덜 떨어져나갈까 이 발밑의 낱장은 도대체 몇 페이지였던가.. 좋은 시 느낌하나 2008.02.19
4월 엽서 / 김성덕 4월 엽서 / 김성덕 봄빛 그윽한 각연사 앞뜰 늙은 보리수나무에 굴집을 짓고 있는 오색딱따구리 한 마리 딱, 딱, 딱 … 젊은 스님의 목탁소리 행간에 몰래 숨어 능청스레 암컷을 부르다가 순간, 부리를 세워 숨을 멈춘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대웅전 추녀에 베여 동강난 고요가 댓돌 양기를 지그시 밟고 .. 좋은 시 느낌하나 2008.02.19
배추,그녀/박자경 배추,그녀/박자경 1톤 트럭에 함부로 실려 가면서도 몸을 덮는 담요 틈새로 엉덩이 살짝 드러내 보인다 앙다문 초록치마 속 감춘 허벅지 사못 부풀어 있다 여린 흙살에 몸 맡기고 칠월 백중 지나 동짓달에 들어서기까지 부지런히 단물 길어 올리며 곰삭은 햇빛 차근차근 몸 갈피에 챙겨 놓았으리 사내.. 좋은 시 느낌하나 2008.02.19